왕혼(王渾, 223년 ~ 297년)은 중국 삼국시대 말기부터 서진(西晉) 초기에 걸쳐 활동한 장수이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현충(玄沖)이며, 병주(幷州) 태원군(太原郡) 사람이다. 조위(曹魏)의 장수였던 왕창(王昶)의 아들이다.
생애 개요
왕혼은 아버지의 작위인 경릉후(京陵侯)를 이어받았으며, 조위 말기에는 황문시랑(黃門侍郞), 월기교위(越騎校尉) 등을 역임하였다. 서진이 건국된 후에는 양렬장군(揚烈將軍)에 임명되고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전임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오나라 정벌
279년, 사마염(司馬炎)이 오나라 정벌을 단행할 당시 왕혼은 안동장군(安東將軍)으로서 강서(江西) 방면을 공격하였다. 280년, 오나라의 승상 장제(張悌)와 심영(沈瑩), 제갈정(諸葛靚)이 이끄는 군사를 요격하여 크게 격파하였고, 장제와 심영을 전사시키고 오군 7,800여 명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왕준과의 갈등
오 정벌 당시 사마염은 왕준(王濬)이 건업(建業)에 이르면 왕혼의 통제를 받도록 명령하였으나, 왕준이 순풍을 타고 단독으로 진격하여 건업을 점령하고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 손호(孫皓)를 사로잡았다. 이에 왕혼은 왕준이 자신의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며 조정에 왕준을 모함하는 글을 올렸고, 이로 인해 두 장수 사이에 오랜 갈등이 발생하였다. 논공행상에서 왕혼은 기존의 식읍에 8천 호를 더하고 경릉후에서 경릉공(京陵公)으로 작위가 승격되었으며, 이후 정동장군(征東將軍)에 임명되었다.
후계자 논쟁과 후일
서진 통일 이후 태자 사마충(司馬衷)의 후계자 적격성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왕혼은 현명한 제왕(齊王) 사마유(司馬攸)를 지지하며 그를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삼을 것을 주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85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290년 사도(司徒)에 임명되었으며, 297년 사망하였다.
평가
왕혼은 서진의 오 정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장수였으나, 왕준과의 갈등 과정에서 질투와 모함을 일삼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또한 훗날 전조(前趙)를 세운 유연(劉淵)을 처형해야 한다는 사마유의 주장을 반대하여 살려준 일은, 결과적으로 서진 멸망의 한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