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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지춘 (청나라)

왕지춘(王之春, 1842년~1906년)은 청나라 말기의 군인, 관료, 외교관, 정치인이다. 자(字)는 작당(爵棠) 또는 작당(芍棠), 호(號)는 초생(椒生)이며, 자칭 작당거사(芍唐居士)라고도 하였다. 호남성(湖南省) 청천(清泉, 현재의 형남현衡南縣) 출신이다. 명말청초의 대사상가 왕부지(王夫之)의 7세 족손(族孫)으로 알려져 있다.

생애

왕지춘은 문동(文童) 출신으로 과거에 실패한 후 무관의 길로 전향하여, 팽옥린(彭玉麟),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 당대의 주요 인물들을 따라 군무를 담당하였다. 1863년 팽옥린의 막하에 들어갔고, 1870년에는 이홍장의 막하에서 활동하였다.

1879년 일본이 류큐(琉球)를 합병하고 중국 동남 연해를 위협하자, 남양대신 심보정(沈葆楨)의 명령을 받고 일본에 파견되어 정탐 활동을 펼쳤다. 귀국 후에는 만언의 상소를 올려 류큐 회복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84년 청불전쟁(중프전쟁)에 참전하였고, 이후 중프 간의 안남(베트남) 국경 획정 담판에 참여하여 외교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후 광동안찰사(廣東按察使), 광동포정사(廣東布政使), 호북포정사(湖北布政使), 사천포정사(四川布政使)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사망과 니콜라이 2세의 즉위를 계기로 특사로 러시아에 파견되어 러시아의 지원을 얻고자 하였다. 귀국길에 프랑스를 방문하여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교섭을 벌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00년 의화단운동(의화단 사건)이 발발하자, 안휘순무(安徽巡撫)로서 동남호보(東南互保)에 참여하여 각국과의 충돌을 회피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안휘성에 최초의 근대 대학인 안휘대학당(安徽大學堂)과 최초의 경찰 기구를 설립하는 등 신정(新政) 추진에 기여하였다.

1902년 광서순무(廣西巡撫)로 전임되었으나, 1903년 일본 신문이 왕지춘이 프랑스에 광서성의 철도와 광산을 저당으로 차관을 요청했다는 기사를 보도하면서 국내에서 '거법징왕(拒法懲王, 프랑스에 항거하고 왕지춘을 징벌하자)' 운동이 일어나 혁직되었다. 이후 이는 허위 사실로 밝혀졌으나, 그의 정치적 생명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1904년 11월 19일, 상해 영조계(英租界)의 금곡향채관(金谷香菜館)에서 혁명당원 만복화(萬福華)의 암살 시도를 받았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 사건으로 황흥(黃興), 장사쇠(章士釗) 등이 연루되어 투옥되는 큰 파문이 일었다.

1906년 병사하였으며, 청조는 그에게 광록대부건위장군(光祿大夫建威將軍)의 관직을 추증하였다.

저서

저서로는 『담영록(談瀛錄)』, 『사아초(使俄草)』, 『국조유원기(國朝柔遠記)』(후에 『중외통상시말기中外通商始末記』로 개명), 『초생수필(椒生隨筆)』, 『방해기략(防海紀略)』, 『왕선산년보(王船山年譜)』 등이 있다. 이 중 『국조유원기』는 1644년부터 1872년까지의 청나라 외교사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저술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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