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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중영 (형)

개요

왕중영(王重盈, ? ~ 895년)은 중국 당나라 말기의 군벌로, 섬괵도와 호국군의 절도사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동생인 왕중영(王重榮)과 구별하기 위하여 "(형)"이라는 표기를 사용하여 나타낸다. 두 사람 모두 한자 표기가 같아 형제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구분 명칭이 붙었다.

출생과 가계

왕중영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가족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당나라의 공식 사서마다 기술이 상이한데, 《구당서》에는 하중(河中, 현 산시성 윈청시) 출신, 《신당서》에는 태원 기현(太原祁縣, 현 산시성 치현) 출신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왕종(王縱)은 당 문종(文宗) 치세 중 대화(大和) 연간에 하중 번진의 기장(騎將)으로 있었고, 이후 천덕군 방어사(天德軍防禦使) 석웅을 따라 위구르 칸국 정벌전에 종군하였다. 이후 당 의종(懿宗) 치세의 함통(咸通) 연간에는 국경 지대에서 세운 전공으로 염주자사(鹽州刺史)에까지 올랐던 무관이었다.

아버지의 음보(蔭補)로 왕중영과 동생 왕중영(王重榮)은 모두 군문에 들어갔으며, 두 사람 모두 '효웅(驍雄)'이라 불릴 만큼 군대 내에서 명성을 떨쳤다. 이외에도 형제로 왕중간(王重簡)이 있었는데, 《신당서》와 《자치통감》에는 왕중간이 왕중영의 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요 경력

왕중영은 처음에 분주자사(汾州刺史, 현 산시성 린펀시)를 역임하였다. 882년 이후에는 섬괵도 관찰사(陝虢道觀察使)로 재임하고 있었다. 당시 황소의 난이 진행 중이었으며, 장안이 황소의 반란군에게 함락되어 당 희종(僖宗)이 성도로 피신한 상황이었다.

같은 해 1월, 희종이 재상 왕탁(王鐸)을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에 임명하여 황소 토벌을 총지휘하게 하면서, 왕중영은 동면도공군사(東面道供軍使)에 임명되어 군량 공급 임무를 맡았다.

883년 당나라 정부군이 황소군을 크게 격파한 이후, 섬괵도는 절도사가 지배하는 번진으로 승격되었고, 왕중영이 그 초대 섬괵절도사에 임명되었다. 885년에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의 재상 직함이 추가로 제수되었다.

호국군 절도사 재임

887년, 동생 왕중영(王重榮)이 아장(牙將) 상행유(常行儒)를 사소한 일로 처벌·모욕한 데에 원한을 품은 상행유가 반란을 일으켜 왕중영(王重榮)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상행유 일파는 왕중영(王重盈)을 절도사로 추대하여 왕중영(王重榮)의 지위를 계승할 것을 요청하였다. 희종은 이를 받아들여 왕중영을 호국군 절도사로 임명하고, 그 아들 왕공(王珙)을 섬괵유후(陝虢留後)로 임명하였다.

왕중영은 하중에 부임한 직후 상행유와 그 일당을 처형하여 군과 민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888년에는 하양절도사(河陽節度使) 이한지(李罕之)가 자신의 영지를 반복적으로 약탈하자, 이한지의 맹우인 하남윤(河南尹) 장전의(張全義)와 비밀리에 결탁하였다. 장전의가 야음을 틈타 하양 번진의 본거지를 습격하여 점거함으로써 이한지를 축출하였다.

891년, 후임 황제 당 소종(昭宗)은 왕중영에게 검교태부(檢校太傅) 겸 중서령(中書令)을 제수하고 낭야왕(瑯琊王)으로 책봉하였다.

사망과 후계 문제

왕중영은 895년에 사망하였다. 호국군 내부의 장병들은 동생 왕중영(王重榮)의 양자인 행군사마(行軍司馬) 왕가(王珂)를 유후로 추대하여 조정에 상속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왕중영의 아들 왕공 또한 호국군 절도사 자리를 희망하여 상속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때 왕가의 장인인 하동절도사 이극용(李克用)이 왕가를 지지하면서, 소종은 왕가를 호국군 절도사로 임명하였다.

가계

  • 어머니: 기국태부인(祁國太夫人) 석(石)씨
  • 형: 왕중간(王重簡) - 화주방어사, 진국군 절도사
  • 동생: 왕중영(王重榮) - 초대 호국군 절도사
  • 장남: 왕관(王瓘, ? ~ 889년 이전) - 진주자사
  • 차남: 왕공(王珙, ? ~ 899년)
  • 3남: 왕요(王瑤, ? ~ 895년) - 강주자사
  • 아들: 왕찬(王瓚, ? ~ 923년)
  • 양자: 왕은(王殷, ? ~ 914년)

의의

왕중영은 당나라 말기 격변기의 대표적인 지방 군벌 가문인 왕씨 일족의 일원으로, 하중과 섬괵 지역을 중심으로 한 번진 체제의 유지와 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사후 호국군의 지위를 둘러싼 그의 아들과 조카 사이의 분쟁은 당말 번진 세력 간 갈등 구조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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