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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휴징)

왕상(王祥, 184년~268년)은 중국 후한 말기부터 조위(曹魏), 서진(西晉)에 걸쳐 활동한 관료이다. 자(字)는 휴징(休徵)이며, 서주(徐州) 낭야국(琅琊國) 임기현(臨沂縣) 출신이다. 이른바 '24효(二十四孝)'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며, 동진(東晉)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증조할아버지인 왕람(王覽)의 배다른 형으로도 알려져 있다.

생애와 행적

왕상은 효성이 지극하여, 자신을 사랑하지 않던 계모 주씨(朱氏)를 극진히 모셔 많은 효행 일화를 남겼다. 대표적인 일화로는 추운 겨울에 계모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자 얼음 위에 누워 몸으로 얼음을 녹여 잉어를 잡았다는 '와빙구리(臥冰求鯉)' 설화가 있으며, 이는 《수신기(搜神記)》 등에 수록되어 전해진다.

후한 말의 혼란기에 백부 왕예(王叡)가 손견(孫堅)에게 살해당하자, 왕상은 어머니와 아우를 데리고 여강(廬江)으로 옮겨 은거하였다. 이후 수십 년간 주(州)·군(郡)의 초빙을 거절하다가, 아우 왕람의 권유로 서주자사 여건(呂虔)의 별가(別駕)로 등용되었다. 여건은 주의 행정 업무를 모두 왕상에게 맡겼으며, 당시 사람들은 왕상을 칭송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무재(茂才)로 천거되어 온현령(溫縣令)이 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대사농(大司農)에 이르렀다. 고귀향공(高貴鄕公, 조모)이 즉위한 뒤에는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지고 광록훈(光祿勳)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사례교위(司隸校尉), 태상(太常)을 거쳐 만세정후(萬歲亭侯)에 봉해졌다. 조위 말기에는 태위(太尉)에 올랐고, 서진 건국 이후에는 태보(太保)가 되었다.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태시(泰始) 5년(268년)에 사망하였다.

가계

할아버지는 왕음(王音), 아버지는 왕융(王融)이다. 아들로는 왕사(王肇), 왕하(王夏), 왕복(王馥), 왕열(王烈), 왕분(王芬)이 있으며, 이복 아우로는 왕람(王覽)이 있다.

평가와 의의

왕상은 효행의 전범으로서 후대에 널리 기려졌으며, 《진서(晉書)》 권33 〈열전〉에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조위와 서진 양대에 걸쳐 사공(司空)·태위(太尉)·태보(太保)에 이르는 고위 관직을 역임한 원로 관료로서, 위(魏) 말 정변 시기에도 원로로서 예법과 신하의 의리를 지키려 한 태도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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