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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령모

왕령모(王令謀, ? ~ 937년 10월 10일)는 중국 오대 십국 시대 정권인 오나라의 관료이자 재상이다. 오나라 말기의 섭정이었던 서지고(徐知誥, 훗날의 이변·李昪)의 측근으로 활약하였으며, 서지고에게 제위를 찬탈할 것을 적극 권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생애

출신과 초기 활동

왕령모의 출생 연도와 출신 지역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다. 912년경, 당시 오나라의 섭정이었던 서온(徐溫)의 양자인 서지고가 승주(昇州, 지금의 장쑤성 난징시) 자사로 부임하면서 자신의 주변에 유능한 인사들로 막료진을 구성하였는데, 왕령모는 이 무렵 서지고의 손님이 되어 결국 그의 판관(判官)이 되었다. 그는 추관(推官) 송제구(宋齊丘), 참군(參軍) 왕굉(王翃)과 함께 서지고의 핵심 참모로 활동하였다.

918년, 서지훈(徐知訓)이 대장 주근(周瑾)에게 암살된 이후 서지고가 광릉(廣陵, 지금의 장쑤성 양저우시)에서 섭정을 맡게 되었을 때, 왕령모는 양주좌사마(揚州左司馬)가 되었다. 이듬해인 919년 오왕 양융연(楊隆演)이 서온의 권고로 오나라 국왕의 존호를 사용할 때, 왕령모는 내추밀사(內樞密使)에 임명되었다.

서지고의 권력 장악 지원

927년 서온이 사망한 이후, 서지고는 의제(義弟)인 서지순(徐知詢)과 권력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서지순은 승주에서 오나라의 대군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서지고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왕령모는 서지고에게 전략을 제시하면서, 서지순이 어리고 다른 관원들과의 대인관계를 관리하는 데 무능하여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이후 서지고는 서지순을 속여 광릉으로 불러들여 구금하고 그의 군대를 접수함으로써 섭정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재상 시절

서지고가 서지순을 제압한 직후, 왕령모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되어 재상이 되었다. 931년 서지고가 광릉을 떠나 금릉(金陵)에 자리 잡을 때, 왕령모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겸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임명되어 송제구와 함께 재상으로 계속 근무하였다.

934년에는 사도(司徒)의 직함과 충무군 절도사(忠武軍節度使)에 추가로 제수되었다. 다만 충무군은 당시 오나라의 북서쪽 이웃 나라인 후당(後唐)의 영토였으므로, 이 절도사 직함은 실질적 권한이 없는 명예직이었다.

제위 선양 권유와 죽음

937년, 왕령모는 당시 제왕(齊王)에 봉해져 있던 서지고(이 무렵 서고·徐誥로 개명)에게 오나라 황제 양부(楊溥)에게서 제위를 선양받을 것을 권하기 위해 직접 금릉으로 갔다. 이 무렵 왕령모는 병이 들고 나이가 들어 치아가 모두 빠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변에서 은퇴를 권유하자, 그는 "제왕을 위한 대사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어찌 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끝까지 서지고의 제위 찬탈을 지지하였다.

왕령모는 서지고에게 다시 선양을 권하는 진정서를 올렸고, 서지고는 오나라 황제 양부에게 제위 양보를 명하는 칙명을 내리게 하였다. 이후 오나라의 고위 관료들이 광릉에서 금릉으로 이동하여 서지고에게 즉위를 권하였으나, 왕령모는 서지고가 실제로 제위를 선양받아 남당(南唐)을 세우기 전에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 연도는 937년 10월 10일로 기록되어 있다.

평가

왕령모는 서지고(이변)의 제위 찬탈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참모 중 한 명으로, 오나라 말기의 정치적 전환기에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정작 남당의 건국을 눈앞에 두고 사망하여 새 왕조의 성립을 직접 목격하지 못하였다. 주요 사료로는 《자치통감》과 《십국춘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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