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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광 (경시)

왕광(王匡, ? ~ 25년)은 중국 신나라 말기의 인물로, 녹림의 난의 주모자이자 녹림군을 창시한 인물 중 한 명이며, 이후 한(漢) 경시제 정권에서 중신으로 활동했다. 강하군 신시현(新市縣) 출신이다.

생애

신나라 말기에 남부 지역에 기근이 들면서 백성들 사이에 약탈과 분쟁이 잦아지자, 왕광은 왕봉과 함께 이러한 분쟁을 조정하였다. 그러한 활동을 계기로 백성들에 의해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수백 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으며, 이후 마무, 왕상, 성단 등이 합류하였다. 왕광의 무리는 거병하여 녹림산(綠林山)에 근거지를 마련하였고, 수개월 만에 병력이 7, 8천 명으로 늘어났다.

지황 2년(21년), 형주목이 2만의 군사를 이끌고 녹림군을 공격해 왔으나, 왕광은 강하군 운두(雲杜)현에서 이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사살하였으며 경릉현을 함락시켰다. 이를 계기로 녹림군의 병력은 약 5만여 명에 달하여 주(州)와 군(郡)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세력을 갖추게 되었다.

지황 3년(22년), 녹림군에 역병이 돌아 병력의 절반가량이 사망하자, 녹림군은 분산되었다. 왕광은 왕봉, 마무, 주유 등과 함께 전수군(남양군)으로 이동하였다. 이 부류의 녹림군 일파를 '신시병(新市兵)'이라 불렀다.

용릉 지역에서 전한의 종실인 유연이 용릉병을 일으키고 녹림군과 연합을 추진하자, 왕광은 평림병의 지도자 진목 등과 함께 호응하여 신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소장안취 전투에서 신나라의 전수대부 진부와 전수속정 양구사에게 참패하여 신시병과 평림병은 일시적으로 회군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유연이 다른 일파인 하강병을 끌어들인 결과, 지황 4년(23년) 정월 녹림 연합군은 신나라 군을 격파하고 진부와 양구사를 모두 처단하였다.

경시제 정권에서의 활동

녹림군이 황제를 추대할 때, 신시병과 평림병의 장군들은 유연의 명성이 높음을 꺼려 약한 성품의 평림병 출신 경시장군 유현을 지지하였고, 결국 유현이 황제(경시제)로 옹립되었다. 왕광은 이때 정국상공(定國上公)에 봉해졌다.

경시 원년(23년) 8월, 신나라가 태사 왕광과 국장 애장(哀章)으로 하여금 낙양을 방어하게 하자, 왕광은 경시제의 명령으로 낙양을 공격하였다. 신나라 황제 왕망이 살해된 9월, 낙양을 함락시켜 신나라의 왕광과 애장을 생포하여 수도 완(宛)으로 보냈으며, 이들은 완에서 모두 처형되었다.

경시 2년(24년) 2월, 경시제가 장안으로 천도하면서 이성제후왕을 봉할 때, 왕광은 남양군 비양현 지역을 하사받아 비양왕(比陽王)에 봉해졌다. 이후 장앙과 함께 삼보 지역에서 횡포를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최후

12월 적미군이 입관하자, 왕광은 양읍왕 성단, 항위장군 유균 등과 함께 하동군과 홍농군에 나뉘어 주둔하며 적미군을 막으려 하였으나, 병력의 열세로 충분히 방어하지 못하였다. 후한의 광무제는 경시제 정권이 적미군을 상대하지 못할 것임을 판단하고 등우를 파견하였다. 등우는 건무 원년(25년) 정월 하동군에 진입하여 경시제 측의 군대를 연이어 격파하였다. 왕광은 성단, 유균 등과 함께 군사를 합쳐 10여 만 명의 병력으로 등우와 맞서 싸웠다. 초기에는 등우 군을 압박하였으나, 이후 등우의 기동 전술에 패배하여 왕광은 군대를 이탈하고 장안으로 달아났다.

이후 장안 내에서 경시제와 장앙 사이의 분쟁이 격화되었고, 왕광은 장앙 편에 서게 되었다. 장안이 적미군에게 함락된 후 왕광은 적미군에 항복하여 함께 진격하였다. 같은 해, 왕광은 호은, 성단 등과 함께 후한의 상서 종광에게 항복하여 동쪽으로 이동하던 중, 안읍에서 도주를 시도하다가 종광에게 처형되었다.

출전

  • 《후한서》 권11, 유현유분자열전
  • 《후한서》 권14, 종실삼왕사후열전
  • 《후한서》 권16, 등구열전
  • 《후한서》 권1, 광무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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