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예크 전투(세르보크로아트어: Bitka za Osijek)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기간인 1991년 8월부터 1992년 6월까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크로아티아 동부 슬라보니아 지역의 도시 오시예크(Osijek)를 대상으로 수행한 포격 및 지상 공세 교전이다.
배경
1990년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총선에서 민족주의 성향 정권이 승리한 이후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과 크로아티아 정부 간의 민족 긴장이 고조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세르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실질적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1991년 여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크로아티아 영토 내에서 세르브계 반군을 지원하고 크로아티아 경찰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였다.
전투 과정
유고 인민군은 1991년 7월 3일 처음으로 크로아티아에 직접 개입하여 오시예크 북쪽과 동쪽의 여러 마을을 점령하였다. 1991년 7월 31일부터 박격포를 이용한 오시예크 포격이 시작되었으며, 8월 19일에는 도시 중심부가 집중적으로 포격당했다. 포격은 1991년 11월과 12월에 절정에 달했는데, 분당 1발 꼴의 포격이 보고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 공군의 공습까지 더해졌다. 크로아티아 측 주장에 따르면 총 6,000발의 포탄이 오시예크에 떨어졌다.
1991년 11월 18일 유고 인민군이 부코바르를 점령한 후, 세르비아 의용방위군의 지원을 받은 유고 인민군 제12(노비사드)군단은 오시예크를 향해 남쪽과 동쪽 방면으로 진격했다. 크로아티아군은 방어선을 유지하며 유고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12월 중순, 크로아티아 육군은 암호명 "악마의 빛줄기 작전"(Operacija Đavolja greda)이라는 공세를 펼쳐 오시예크 북쪽 드라바강 지역에서 유고 인민군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1992년 1월 양 교전국이 밴스 계획을 받아들이면서 집중적 포격은 중단되었고, 1992년 6월에 포격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결과 및 피해
이 전투는 영토 변화 없이 크로아티아의 오시예크 방어 성공으로 종결되었다. 전투 기간 약 800명이 포격으로 사망했으며, 1995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종결 시까지 오시예크에서는 군인 1,327명과 민간인 397명을 포함해 총 1,724명이 사망했다. 도시가 입은 직접적인 재산 피해는 약 13억 달러(미화)로 추산되었다. 포격이 가장 심했던 시기에는 오시예크 인구(전쟁 전 약 10만 4,761명)의 대부분이 도시를 탈출하여 1만 명 미만만 남아 있었다.
전후 처리
크로아티아 정부는 민간인에 대한 전쟁 범죄 혐의로 유고 인민군 장교 13명을 기소했으나 현재까지 체포된 장교는 없다. 또한 오시예크의 전시 방어 사령관이었던 브라니미르 글라바시(Branimir Glavaš) 등 크로아티아 군인 5명이 전쟁 중 전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10년 크로아티아 대통령 이보 요시포비치는 오시예크 인근 파울린드보르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