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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티아 안티카

오스티아 안티카(Ostia Antica)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남서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로마의 항구 도시 유적지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로마 광역시에 속하는 오스티아 지역에 해당한다. '오스티아'(Ostia)라는 지명은 라틴어로 '하구'를 뜻하는 '오스'(Os)에서 유래하였으며, 테베레강(Tiber)이 지중해로 흘러드는 어구에 자리 잡고 있었던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다만 수세기에 걸친 토사 침적으로 인해 현재 유적의 위치는 바다에서 약 3km 떨어져 있다.

기원과 초기 역사

전승에 따르면 오스티아는 로마의 첫 번째 식민 도시(콜로니아, colonia)였으며, 로마의 제4대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Ancus Marcius, 재위 기원전 640~616년경)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굴된 가장 오래된 고고학적 증거는 기원전 4세기경의 것이며, 현재 가시적인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3세기의 군 주둔지(카스트룸, castrum)와 카피톨리움(Capitolium, 유피테르·유노·미네르바 신전)이다. 초기 오스티아는 로마의 해군 기지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기원전 267년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부터 점차 상업 항구로 기능하기 시작하였다.

공화정 시기

기원전 1세기, 오스티아는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와 술라(Sulla) 간의 내전 당시 격전지가 되었다. 기원전 87년 마리우스는 로마로 향하는 물자 흐름을 차단하기 위해 오스티아를 공격하여 점령·약탈하였다. 기원전 68년에는 해적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항구가 불탔고 집정관의 함대가 파괴되었으며, 이 사건은 폼페이우스(Pompeius)가 해적 토벌을 위한 가비니아 법(Lex Gabinia)을 발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오스티아는 재건되었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의 주도로 방어용 성벽이 축조되었다.

제정 시기와 번성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독재관 시기 오스티아는 로마의 곡물 공급 체계 개선의 일환으로 정비되었다. 티베리우스(Tiberius) 황제 시기인 서기 1세기에는 첫 번째 포룸(forum, 광장)이 건설되었고, 도시는 더욱 발전하였다.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는 테베레강 북쪽 하구에 새로운 항구(포르투스, Portus) 건설을 명령하였으며, 트라야누스(Trajan) 황제는 서기 113년에 파도의 침식을 줄이기 위해 육각형 형태의 새로운 항구를 완공하였다.

오스티아는 서기 2~3세기에 인구 약 10만 명에 이르며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 도시는 대규모 극장, 다수의 공중 목욕탕(테르마이, thermae), 여관 및 선술집, 소방 시설, 길드 광장(Piazzale delle Corporazioni) 등을 갖추었다. 길드 광장의 바닥 모자이크에는 지중해 각지의 해운 회사와 상업 길드의 명칭이 새겨져 있어 당시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오스티아에는 유럽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인 오스티아 시나고그(Ostia Synagogue)가 있었으며, 이는 1960~1961년 발굴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미트라교(Mithraism) 신앙 역시 널리 퍼져 18곳의 미트라에움(Mithraeum, 미트라 신전)이 발견되었다.

쇠퇴와 멸망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가 포르투스를 독립 자치 도시(무니키피움, municipium)로 승격하면서 오스티아의 항구 기능은 점차 축소되었고, 대신 로마 귀족 계층의 교외 휴양지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오스티아는 서기 4~5세기까지도 목욕탕·교회·거리·항구 시설 등이 지속적으로 유지·보수되며 상당한 번영을 누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 이후 오스티아는 점차 쇠퇴하였고, 아랍 해적(사라센)의 반복된 침입과 약탈로 인해 결국 서기 9세기에 버려졌다. 849년에는 기독교 세력과 사라센 간의 오스티아 해전이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남아 있던 주민들은 인근의 그레고리오폴리스(Gregoriopolis)로 이주하였다.

발굴과 현재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 오스티아의 유적은 바로크 건축가들에 의해 대리석 채석장처럼 사용되기도 하였고, 외국인 탐험가들이 고대 조각상과 유물을 찾아 방문하기도 하였다. 교황 비오 7세(Pius VII) 시기에 교황청 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정권 시기인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대규모 발굴이 진행되었다. 1954년에는 공식 발굴 보고서 시리즈인 《Scavi di Ostia》의 제1권이 출간되었다. 현재까지도 오스티아의 약 3분의 2는 발굴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오스티아 안티카의 발굴 지역은 일반에 공개된 관광지로 운영되고 있으며, 출토 유물들은 오스티아 고고학 박물관(Museo Ostiense)에서 소장·전시되고 있다. 고대 극장은 이따금 문화 행사에 사용되기도 한다. 이 유적지는 고대 로마의 도시 계획, 건축 기술, 일상생활, 상업 및 종교 관행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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