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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란 관계

영국-이란 관계는 영국(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과 이란(이슬람 공화국) 간의 외교적, 경제적, 역사적 상호작용을 포괄하는 양자 관계이다. 서방에서 1935년 이전까지 '페르시아'로 불렸던 이란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동맹을 모색하기 위해 제프리 오브 랭리를 일 칸국 궁정에 파견했던 13세기 후반부터 잉글랜드와 정치적 관계를 맺어 왔다. 19세기 초까지 이란은 영국에 있어 멀고 전설적인 나라로 인식되었으나, 19세기 중반 이후 이란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둘러싼 완충국으로서 지정학적 중요성이 커졌다.

역사적 배경

초기 관계 (사파비 왕조 ~ 카자르 왕조 시기) 1597년, 사파비 왕조의 샤 압바스 1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을 모색하며 로버트 셜리와 앤서니 셜리 등 26명의 영국 사절을 카즈빈에서 접견하였다.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가 페르시아에 진출하였고, 1616년에는 호르무즈 해협의 자스크를 경유한 비단 무역로가 개설되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인도 침공 가능성에 대한 영국의 우려와 프랑스에 대한 이란의 불신이 맞물려 1809년 양국 간 '친선 및 동맹 예비 조약'이 체결되었다. 1856년부터 1857년까지는 헤라트(아프가니스탄) 지역을 둘러싼 영국-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이 전쟁 이후 영국은 이란의 남부 및 동부 국경을 결정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레이트 게임과 외세의 개입 19세기 동안 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으로 불리는 중앙아시아와 이란 지역에서의 세력 경쟁을 벌였다. 1907년 영러 협약은 이란을 러시아의 북부 영향권과 영국의 남부 영향권으로 분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에 대한 대중적 반발은 페르시아 입헌 혁명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과적으로 카자르 왕조의 붕괴로 귀결되었다.

팔라비 왕조 시기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 장군의 개입이 1920년대 레자 샤 팔라비의 집권으로 이어졌으며, 영국이 1921년 쿠데타에 개입했다는 인식은 당시 미국 대사관에 의해서도 보고되었다. 1928년 이란은 외국 열강과 체결한 치외법권 협정을 폐기하였다. 그러나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쟁점은 석유 문제였다. 1901년 윌리엄 녹스 다아시에게 부여된 석유 채굴권을 바탕으로 앵글로-페르시아 석유 회사(APOC)가 이란 석유 산업을 사실상 독점한 데 대해 이란이 조건 개정을 요구하면서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장기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레자 샤는 1932년 다아시 협정 취소를 선언하였다. 이 분쟁은 헤이그의 상설국제법원에 회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 영국과 소련은 이란을 공동 침공하였고, 레자 샤는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즉위하여 1942년 1월 영국 및 소련과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였다.

1951년 3월, 이란은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 주도 하에 석유 산업 국유화를 단행하였고, 이는 영국과의 심각한 긴장을 초래하였다. 1953년,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의 공동 작전인 '아약스 작전'을 통해 모사데그 정권이 축출되었다. 이 쿠데타는 이란 사회에 영국에 대한 깊은 불신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이란 문화 전반에서 영국 정부를 불신하는 태도가 보편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구도 속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이란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영국군은 1968년부터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공화국 시기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영국은 이란과의 모든 외교 관계를 중단하였다. 1980년 4월, 런던에 위치한 이란 대사관이 6명의 무장 테러 조직에 의해 점거되었으며, 6일 후 영국 특수부대 SAS의 급습으로 인질이 구출되었다(이란 대사관 포위 사건). 영국은 1988년 테헤란에 대사관을 재개설하였으나, 이듬해인 1989년 루홀라 호메이니가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에 대한 파트와(종교적 살해 명령)를 선포하면서 외교 관계가 다시 단절되었고, 1990년에 대리대사급으로만 재개되었다.

1997년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의 개혁 정권 출범 이후 관계가 정상화되기 시작하였으며, 2001년 잭 스트로 영국 외무장관이 혁명 이후 처음으로 고위 정치인 자격으로 테헤란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2002년 테헤란이 새 영국 대사로 지명된 데이비드 레드어웨이를 간첩 혐의로 거부하면서 관계에 차질이 발생하였다.

2000년대 이후의 갈등 2004년 6월, 영국 해군 8명이 이란 혁명수비대에 의해 페르시아만에서 나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2005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당선과 이란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면서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2007년 3월, 영국 해군 15명이 이란 영해 침범 혐의로 나포되었으며, 약 2주 후 석방되었다.

2009년 이란 대선 논란과 그에 따른 시위 과정에서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는 영국 정부를 서방 국가 중 "가장 사악한" 정부라고 비난하였다. 이란은 영국 외교관 2명을 추방하였고, 영국도 이에 맞대응하여 이란 외교관 2명을 추방하였다.

2011년 11월, 영국·미국·캐나다의 공동 제재에 대응하여 이란은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격하시키고 영국 대사를 추방하였다. 다음 날, 이란의 시위대가 테헤란에 있는 영국 대사관 건물 두 곳을 습격하여 창문을 파괴하고 문서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영국은 테헤란 대사관을 폐쇄하고 런던 주재 이란 대사관 폐쇄를 명령하며 모든 이란 외교관을 48시간 이내에 추방하였다.

관계 복원과 회복 시도 2013년 7월, 하산 로하니 대통령의 당선 이후 영국은 단계적인 관계 개선을 모색하였다. 2014년 2월 양국은 대리대사 교환에 합의하였고, 2015년에는 양국 대사관이 동시에 공식 재개관되었다. 2016년 9월에는 외교 관계가 2011년 이전 수준으로 완전 회복되었으며, 니콜라스 홉튼이 테헤란 주재 영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2010년대 후반 ~ 현재 2019년 7월, 지브롤터 해역에서 영국 해병대가 이란 유조선 그레이스 1호를 EU의 시리아 제재 위반 혐의로 나포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란은 영국 국적의 유조선 스테나 임페로 호를 호르무즈 해협에서 나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페르시아만 지역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영국은 미국 주도의 해상 안보 작전에 합류하였다.

2022년 3월, 영국 정부는 1970년대 이란 왕정 시절 무기 계약과 관련하여 약 4억 파운드(약 3억 9380만 파운드)의 빚을 이란에 상환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란에 억류되어 있던 영국-이란 이중국적자 나자닌 자가리-랫클리프(2016년 체포)와 아누셰 아슈리가 석방되었다. 2023년 1월, 이란은 영국-이란 이중국적자 알리레자 아크바리를 처형하였다.

2023년 4월, EU와 영국은 마흐사 아미니 시위 진압 과정의 인권 침해 혐의로 이란 관리 30여 명과 혁명수비대 일부 부대에 대한 제재를 부과하였다. 2024년 1월, 영국은 이란 국외에서 암살 및 위협 활동을 계획한 혐의로 이란의 840부대와 그 구성원들에 대한 제재를 발표하였다. 2024년 11월, 전 영국 군인 다니엘 칼리프가 이란을 위한 간첩 활동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25년 5월, 영국 경찰은 런던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에 대한 공격을 모의한 혐의로 이란 국적자 5명을 체포하였다. 같은 해 7월, 영국을 포함한 14개국은 이란 정보기관의 유럽 및 북미 내 암살·납치·괴롭힘 계획 급증을 규탄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경제 관계 2000년대 초반 영국의 이란 수출액은 증가 추세를 보였다. 2000년 2억 9600만 파운드에서 2004년 4억 4380만 파운드로 증가하였다. 2009년 기준으로 영국 내 동결된 이란 자산은 약 9억 7600만 파운드(약 16억 4000만 달러)에 달하였다. 2011년 11월, 영국은 이란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미국·캐나다와의 공동 제재 일환으로 이란 은행과의 모든 거래를 단절하였다.

외교 공관

  • 이란은 런던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 영국은 테헤란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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