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 전투는 1273년(고려 원종 14년) 삼별초가 마지막 항쟁을 벌이던 제주도(당시 탐라 또는 여양으로도 불림)를 몽골-고려 연합군이 공격하여 진압한 전투이다. 이 전투로 1270년부터 시작된 삼별초의 난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배경 1259년 몽골과 강화가 성립된 이후, 고려는 친몽골 정책을 추진하며 개경 환도를 단행했다. 이에 개경 환도와 몽골과의 강화를 반대하던 무신 정권의 잔존 세력이자 대몽 항전의 상징이었던 삼별초는 배중손을 중심으로 진도 용장산성에서 항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1271년 진도가 몽골-고려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자, 김통정의 지휘 아래 삼별초는 제주도(당시 탐라국이었으나 몽골에 복속되어 있었음)로 근거지를 옮겨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삼별초는 제주도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항파두리성 등 방어 시설을 구축하며 저항했다.
전개 몽골 쿠빌라이 칸은 삼별초의 완전 진압을 위해 몽골군 사령관 혼돈(忽敦)과 고려군 사령관 김방경에게 병력을 주어 제주도 공격을 명했다. 1273년(원종 14년) 2월,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과 혼돈이 이끄는 몽골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약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향했다. 연합군은 제주도에 상륙하여 삼별초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김통정은 제주도 곳곳에 성을 쌓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연합군의 대규모 공세 앞에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특히 연합군은 화포 등 당시 최신 무기를 사용하여 삼별초의 방어시설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치열한 공방 끝에 연합군은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인 항파두리성을 향해 진격했다.
결과 1273년 4월 말, 몽골-고려 연합군은 항파두리성을 함락시켰다. 삼별초의 지휘관 김통정은 전사하거나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삼별초 병력은 거의 전멸했다. 이로써 1270년부터 시작된 삼별초의 난은 3년 만에 완전히 진압되었다.
영향 및 의의 여양 전투의 결과로 삼별초의 난은 완전히 종식되었고, 고려는 몽골의 강력한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특히 제주도는 몽골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가 설치되어 약 10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이는 제주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투는 대몽 항전의 마지막 불꽃이 꺼진 사건으로, 고려의 역사에서 자주적인 대외 정책이 사실상 불가능해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