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 일대에서 발생한 무장 반란과 그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여순 사건(麗順事件)' 또는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도 불린다.
배경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는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병 명령을 받았다. 당시 제14연대 내에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계열의 군인들이 상당수 침투해 있었으며, 군과 경찰 간의 관계도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 국방경비대는 모병제로 운영되었고 신원 조회가 허술하여 좌익 성향 인사들이 위장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과
1948년 10월 19일, 제14연대의 상사 지창수(池昌洙)와 중위 김지회(金知會) 등을 중심으로 한 군인 약 2,000여 명이 제주도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후 순천으로 이동하여 14연대 내 다른 중대 병력과 합류하였고, 이후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 곡성 등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에 의해 경찰관과 우익 인사 등 약 150명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10개 대대 규모의 진압군을 파견하였다. 10월 22일부터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되어 10월 23일 순천이 수복되었고, 10월 25일부터 이틀간의 시가전 끝에 10월 27일 여수가 완전히 장악되면서 사태는 진정되었다. 반란군의 주력은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도주하여 이후 게릴라(빨치산) 활동을 지속하였으며, 주동자들은 이듬해까지 토벌작전으로 사살되었다.
피해 규모
진압 과정에서 진압군과 경찰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반란군 협조자 색출 작업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통계가 존재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약 2,000~5,0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추정하고 있으며, 위키백과는 민간인 약 2,500여 명이 진압군·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재산 피해는 약 100억 원, 가옥 소실은 약 2천 호로 집계되었다.
결과 및 영향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강력한 반공 체제를 구축하였다.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고, 군 내부에서는 좌익 세력을 숙청하는 '숙군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어 약 5%의 장병이 군에서 제대하였다. 또한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은 사건 직후 '극우 정객'이 공산주의자와 결탁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김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남로당 조직 명단이 입수되었고, 여기에서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훗날 대통령)의 이름이 발견되어 체포·기소되었으나 이후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법적 규정
2021년 7월 20일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법률 제18303호)이 제정되어,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이 법은 사건 발생일인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 1일까지의 기간을 사건 범위로 규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