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여수 진남관(麗水 鎭南館)은 전라남도 여수시 동문로 11(군자동)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관아 건축물로, 2001년 4월 17일 대한민국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15칸, 측면 5칸, 총 75칸 규모에 건물 면적 약 240평으로, 현존하는 국내 단층 목조 건축물 및 지방 관아 건축물 중 가장 큰 규모이다.
건립 배경과 역사
진남관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이순신(李舜臣)이 전라좌수사로 재임할 당시 수군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진해루(鎭海樓)가 있던 곳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 당시 진해루가 소실되자,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해인 1599년(선조 32년), 이순신의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李時言)이 그 터에 75칸 규모의 객사(客舍)를 건립하고 '진남관(鎭南館)'이라 명명하였다. '진남'이라는 이름은 '남쪽(왜구)을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716년(숙종 42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718년(숙종 44년) 전라좌수사 이제면(李濟冕)이 중건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1963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1년 국보로 승격되었다.
건축적 특징
진남관은 팔작지붕 형식의 단층 목조 건물이다. 건물은 계좌정향(癸坐丁向), 즉 북동쪽을 등지고 남남서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높은 언덕 위에 배치되었다. 사괴석(四塊石)과 장대석(長臺石)을 섞어 쌓은 기단 위에 막돌주초를 놓고 민흘림두리기둥을 세웠다.
공포(栱包, 포작)는 주심포식(柱心包式)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다포식(多包式)의 기법이 혼합되어 있으며, 출목(出目)은 이출목이다. 살미첨차(山彌檐遮)는 쇠서(牛舌) 형상에 연꽃 문양을 새겨 장식하였다. 평면은 외진(外陣)과 내진(內陣) 사이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여 대들보를 걸었고, 건물 전체에 벽체나 창호를 달지 않고 통간(通間)으로 개방한 점이 특징이다.
기둥은 기존에 68개로 알려졌으나, 2010년대 해체보수 공사 중 마루 밑에서 초석 2개와 잘린 기둥 밑부분이 추가로 발견되어 총 70개의 기둥으로 확인되었다. 정면 어칸 기둥과 우주에는 용머리 장식의 익공(翼工) 공법이 사용되었으며, 각 주칸에는 화려한 화반(花盤)이 배열되어 있다. 내·외부 부재에는 금단청 및 모로단청 등이 확인된다.
규모와 가치
정면 15칸, 측면 5칸이라는 규모는 사찰의 법당이나 궁궐 건물, 종묘 정전 등을 제외하면 합천 해인사 경판고와 진남관 두 곳에만 나타나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이다. 18세기 초에 중건된 건물이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 중심 기지로서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당시의 건축 기법과 예술적 수준을 보여주는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부속 시설
진남관의 정문 역할을 하는 2층 누각인 망해루(望海樓)는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다. 진남관 뜰 안에는 여수석인(麗水石人)으로 불리는 사람 형상의 석인상(石人像)이 남아 있다. 이 석인상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왜구의 눈을 속이기 위해 7기의 석인을 세웠다는 전설과 관련이 있으며, 현재는 두건에 도포를 입고 팔짱을 낀 문인 형상의 석인 1기만 전해진다.
최근 현황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전면 해체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해체 과정에서 진남관 동쪽에서 옛 건물지와 보도 흔적이 발굴되어 공사 일정이 연장되었으며, 2025년 5월 30일 공식적으로 개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