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불위(呂不韋, ? ~ 기원전 235년)는 중국 전국 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정치가이자 상인 출신 관료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유향의 《전국책(戰國策)》 등에 주요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출생과 배경
여불위의 출생지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유향은 위(衛)나라 복양(濮陽) 출신으로, 사마천은 양적(陽翟) 출신으로 기록하였다. 그는 원래 상인이었으며, 여러 지역을 오가며 장사하여 천금(千金)에 달하는 재산을 축적한 대상인이었다.
이인(異人)과의 만남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장사하던 중, 진나라의 왕족으로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던 이인(異人, 후에 자초로 개명)을 만났다. 여불위는 이인을 두고 "기이한 물건이니 사둘 만하다(此奇貨可居)"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투자하여 이인이 진나라의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여불위는 진나라로 건너가 안국군(安國君, 후의 효문왕)의 총비였던 화양부인(華陽夫人)을 설득하여 이인을 그녀의 양자로 들이고 세자로 삼게 하였다.
진나라 재상 시기
이인이 진나라의 왕(장양왕)으로 즉위하자, 여불위는 승상(丞相)이 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졌다. 기원전 246년 장양왕이 사망하고 진왕 정(政, 후의 진시황제)이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여불위는 상방(相邦)이 되어 중부(仲父)라는 칭호로 불리며 국정을 총괄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 편찬
여불위는 3천 명의 식객을 모아들였으며, 그중에는 후에 진의 승상이 된 이사(李斯)도 있었다. 기원전 239년, 식객 중 석학들을 동원하여 《여씨춘추》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을 종합한 백과사전적 저작으로, 여불위는 완성된 책을 함양성 성벽에 전시하고 "이 책에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자에게 천금을 주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몰락과 최후
진왕 정이 성장하면서 여불위는 태후(진시황의 생모)와의 밀통 관계를 감추기 위해 노애(嫪毐)라는 인물을 태후에게 소개하였다. 노애가 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다 모반을 꾀하였으나 진압되었고, 이 사건에 연루된 여불위는 승상직에서 물러나 칩거에 들어갔다. 이후 기원전 236년, 반란 혐의로 촉(蜀) 땅으로 유배가 명해지자, 여불위는 스스로 독을 마시고 생을 마감하였다.
평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여불위를 두고 《논어》의 '문(聞)'이라는 개념을 인용하여, 실속 없이 소문만 번드르르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한편 여불위는 상인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최고 권력자로 올라섰다가 몰락한 인물로서, 중국 역사에서 권모술수와 정치적 야망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