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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 아기날도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y Famy, 1869년 3월 22일 ~ 1964년 2월 6일)는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군사 지도자, 정치인으로, 필리핀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899~1901)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주의 헌법에 기반한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생애 초기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스페인령 필리핀 카비테 엘 비에호(현재의 카윗)에서 카를로스 아기날도와 트리니다드 파미의 여덟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중국-타갈로그 혼혈(메스티소) 출신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이었으며, 아버지는 스페인 식민 행정 체제에서 마을 행정관(고베르나도르시요)을 지냈다. 아기날도는 마닐라의 산후안 데 레트란 대학에서 수학했으나 1882년 콜레라 유행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여 가족의 농장을 관리했다. 1893년 마을 행정 책임자(카베사 데 바랑가이)가 되었고, 1895년에는 카비테 엘 비에호의 초대 시장(카피탄 무니시팔)으로 선출되었다.

필리핀 혁명과 카티푸난

1895년, 아기날도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이끄는 비밀 혁명 조직 카티푸난(Katipunan)에 가입하였으며, 가명 '막달로'(Magdalo)를 사용했다. 1896년 8월 필리핀 혁명이 발발하자 아기날도는 카비테 지역에서 스페인군에 맞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며, 임스 전투, 비나카얀-달라히칸 전투, 사포테 다리 전투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카티푸난 내부에서는 막달로 파벌(아기날도 계열)과 막디왕 파벌(보니파시오 계열)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897년 3월 테헤로스 협약에서 열린 회의에서 아기날도는 부재 중에도 혁명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불복한 보니파시오는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군사 재판을 거쳐 1897년 5월 10일 처형되었다.

비악나바토 협정과 홍콩 망명

스페인군의 압박이 거세지자 아기날도는 불라칸주 비악나바토로 근거지를 옮겼다. 1897년 12월, 그는 스페인 총독 프리모 데 리베라와 비악나바토 협정을 체결하고, 80만 페소의 배상금과 사면을 조건으로 무장 투쟁을 중단한 뒤 홍콩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스페인 측은 약속된 개혁을 이행하지 않았고, 아기날도는 홍콩에서 망명 정부를 재정비하며 독립 운동을 지속했다.

미국-스페인 전쟁과 필리핀 독립 선언

1898년 4월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아기날도는 미국 영사관 및 조지 듀이 제독과 접촉하여 필리핀으로 귀환하기로 합의했다. 1898년 5월 19일 귀국한 그는 스페인에 대한 무장 투쟁을 재개했다. 1898년 5월 24일 임시 독재 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수반이 되었으며, 1898년 6월 12일 카비테에서 필리핀 독립을 선언하고 필리핀 국기를 처음으로 게양했다. 1898년 6월 23일 독재 정부를 혁명 정부로 전환하고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필리핀 제1공화국

1899년 1월 23일 말롤로스 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필리핀 제1공화국이 정식 수립되었고, 아기날도는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주의 헌법에 기반한 공화국이었다. 그러나 1898년 12월 파리 조약으로 필리핀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할양되면서 미국과 필리핀 혁명 정부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필리핀-미국 전쟁

1899년 2월 4일 마닐라에서 미군과 필리핀군 간의 충돌이 발생하여 필리핀-미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미군에 밀려 아기날도의 정부는 여러 차례 이동해야 했으며, 1899년 11월에는 정규군을 해산하고 게릴라전으로 전환했다. 1901년 3월 23일, 프레드릭 펀스턴 장군이 이끄는 미군과 마카베베 정찰대의 작전으로 이사벨라주 팔라난에서 아기날도는 체포되었다. 1901년 4월 19일, 그는 미국에 충성 서약을 하고 필리핀 국민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미국 통치기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기날도는 공적 생활에서 은퇴하여 카비테에서 거주했다. 1935년 필리핀 자치령 수립과 함께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마누엘 L. 케손에게 압도적인 차이로 패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자 아기날도는 일본과 협력하여 반미 심리전에 참여하고, 1943년 필리핀 제2공화국 수립 과정에 관여했다. 전후 그는 일본 협력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1948년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의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만년과 사망

1950년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에 의해 국가 원로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1기 임기를 수행했다. 1962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이 독립 기념일을 7월 4일에서 6월 12일로 변경하자, 아기날도는 병상에서 일어나 기념식에 참석했다. 1964년 2월 6일, 케손시티의 베테랑 메모리얼 병원에서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했으며, 향년 94세였다. 그의 유해는 카비테주 카윗에 위치한 아기날도 성소에 안장되었다.

논란과 평가

아기날도는 필리핀 독립의 상징적 인물이자 국부(國父)로 평가받는 한편, 여러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처형과 안토니오 루나 장군의 암살에 연루된 정황이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과의 협력 행보는 부정적 평가의 주요 원인이다. 필리핀 내에서는 그를 독립 영웅으로 보는 시각과 독재적 성향의 인물로 보는 시각이 공존한다. 그의 초상은 과거 5페소 지폐와 동전에 사용되었으나, 2017년부터는 보니파시오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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