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오페르트는 19세기 독일의 상인이자 모험가로, 1868년(고종 5년) 조선의 흥선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 시도했던 사건(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본명은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이다.
생애 및 활동
오페르트는 1832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동아시아 지역에서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는 주로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으며, 당시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던 조선에 관심을 가졌다. 오페르트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 천주교 포교의 자유를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
1868년 4월, 오페르트는 프랑스인 선교사 스타니슬라스 페롱(Stanislas Féron)과 미국인 선원 등을 포함한 140여 명의 일행을 조직하여 소형 증기선을 타고 조선으로 향했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추존왕)의 묘를 도굴하여 유해를 인질로 삼아 조선 정부에 통상 개방 및 천주교 포교 허용을 강요할 계획이었다.
오페르트 일행은 충청도 덕산(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상륙하여 가야산에 위치한 남연군묘로 향했다. 그들은 도굴을 시도했으나, 남연군묘가 견고하게 회격(灰隔, 석회를 섞어 단단하게 봉분하는 방식)으로 봉분되어 있어 쉽게 훼손되지 않았다. 또한, 현지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과 오페르트 일행 내의 불화로 인해 도굴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유해를 얻지 못한 채 철수해야만 했다.
사건의 영향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조선 내의 반외세 감정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흥선대원군은 이 사건을 서양 세력의 야만성과 침략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삼아,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척화비(斥和碑)를 전국 각지에 세워 서양 세력과의 통상을 절대 불허한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는 이후 조선의 개항을 지연시키고 외세와의 충돌을 더욱 격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그의 무역 활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같이 보기
- 남연군묘 도굴 사건
- 흥선대원군
- 쇄국정책
- 병인양요
- 신미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