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유소 장군 묘역은 대한민국 경기도 동두천시 광암동 산 65에 위치한, 조선 전기의 무신 어유소(魚有沼, 1434~1489) 장군의 무덤이다. 1986년 4월 28일 동두천시 향토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어유소 장군의 생애
어유소는 본관이 충주(忠州)이며, 자는 자유(子遊)이다. 아버지는 병마수군절제사를 지낸 무장 어득해(魚得海)이다. 1434년(세종 16) 양주(현 동두천시 지행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1451년(문종 1) 내금위에 선발되었고, 1456년(세조 2) 3월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복시직장과 감찰을 역임하였다. 1460년 북방의 야인(여진족) 정벌에 공을 세워 통례문통찬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절충장군이 되었다. 1463년에는 가선대부로 회령부사가 되었다.
1467년(세조 13) 함길도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좌대장으로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청·경성·만령 등지에서 큰 공을 세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였다. 이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봉되어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지고 공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같은 해 겨울 명나라가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 강순의 좌상 대장으로서 고사리로부터 올미부를 쳐서 건주위의 이만주 부자를 죽이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후 1469년(예종 1) 함경북도절도사, 1471년(성종 2) 좌리공신 4등에 봉해졌으며, 두 차례에 걸쳐 영안북도(永安北道) 절도사를 지냈다. 1477년 병조판서, 1478년 의정부 우찬성,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7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다시 건주위를 정벌할 때 서정대장으로 1만 군사를 이끌고 만포진에 이르렀으나, 압록강의 물이 얼지 않아 건널 수 없고 군사들의 동사자가 속출할 것을 우려하여 조정에 통고하지 않고 자의로 군사를 돌렸다가 탄핵을 받아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후 복권되어 1482년 영안도순찰사, 1488년 판중추부사 겸 도총관을 지냈다. 1489년(성종 20) 10월 성종의 강무(講武) 도중 경기도 영평의 함정현 사장에서 기진하여 사망하였다. 시호는 정장(貞莊)이다.
묘역의 구성과 특징
묘역은 조선 성종 대에 조성된 것으로, 묘 앞에는 묘비·상석·무인석이 갖추어져 있다.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의 묘가 합장되어 있다. 신도비는 화강암의 방형 기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월두형의 비신에 투구형의 옥개(屋蓋)가 조각된 것이 특징적이다. 성종의 아들 어세겸이 비문을 찬하고 안심서가 전액을 썼다고 전해지나, 비문은 거의 마모되어 확인되지 않으며 '정장공신도비명(貞莊公神道碑銘)'이라는 전액만 확인될 뿐이다.
현황
묘역은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미군부대 내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이 제한적이었다. 다만 미군부대 이전에 따라 일반인 방문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관리 기관은 동두천시청 문화체육과이다. 한편 동두천시 탑동동에는 어유소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별도로 있으며, 이는 동두천시 향토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