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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 (후한)

양진(楊震, 54년~124년)은 중국 후한(後漢) 초기에서 중기까지 활동한 관료로, 자는 백기(伯起)이며 홍농군 화음현(華陰縣) 사람이다. 전한(前漢)의 개국공신인 양희(楊喜)의 8세손이며, 고조부 양창(楊敞)은 전한의 승상(丞相)을 지냈다.

생애

양진은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구양상서(歐陽尙書)≫를 깊이 연구했으며, 박학하고 인격이 출중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관서공자(關西孔子)'라는 칭송을 받았다. 오랫동안 은거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50세에 이르러 대장군 등직(鄧騭)의 천거로 수재(秀才)에 천거되어 출사하였다.

그는 형주자사(荊州刺史), 동래태수(東萊太守), 탁군태수(涿郡太守), 사도(司徒), 태위(太尉)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태위 재임 시절 안제(安帝)의 유모인 왕성(王聖)과 중상시(中常侍) 번풍(樊豊) 등이 권세를 휘둘러 조정의 부패가 만연하였는데, 양진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이를 간언하였다. 그러나 번풍 등의 모함을 받아 관직에서 파면되었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독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사지'(四知)의 일화

양진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청렴과 관련된 '사지(四知)'의 고사이다. 그가 동래태수로 부임하여 창읍(昌邑)을 지나던 중, 일찍이 자신이 수재로 천거했던 창읍령(昌邑令) 왕밀(王密)이 밤중에 금 열 근(十斤)을 가지고 와서 "깊은 밤이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라며 예물을 바쳤다. 이에 양진은 "하늘이 알고, 신(神)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天知,神知,我知,子知。何謂無知!)"라고 말하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왕밀은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고 ≪후한서≫ 양진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 일화는 이후 '사지(四知)'라는 고사성어로 전해지며, 양진의 청렴함을 상징하게 되었다.

가계와 후손

양진의 아들 양병(楊秉), 손자 양표(楊彪) 역시 청렴한 관리로 이름을 날렸으며, ≪후한서≫에 따르면 양진으로부터 양병, 양사(楊賜), 양표에 이르기까지 4대가 연이어 태위 또는 사도에 오른 것을 두고 '사세삼공(四世三公)'이라 하였다. 한편 후세의 기록에 따르면 수(隋)나라를 건국한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양진의 14세손으로 전한다.

평가

양진은 후한 시기 부패한 정치 환경 속에서도 청렴과 강직함을 잃지 않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사지' 일화는 후대에 '사지선생'(四知先生), '사지태수'(四知太守) 등의 별칭을 낳았고, 그의 청렴한 가풍은 '청백전가'(清白傳家)로 이어졌다. 중국의 여러 지역에는 그를 기리는 '사지당'(四知堂)과 사당이 세워졌으며, 양씨(楊氏) 일부 종파에서는 그를 기리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주요 사료로는 ≪후한서≫ 권54 양진열전이 있으며, ≪자치통감≫ 등에도 그의 행적이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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