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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로국

야마시로국(일본어: 山城国, やましろのくに, 야마시로노쿠니)은 일본의 기나이(畿内)에 설치되었던 옛 구니(國)이다. 현재의 교토부(京都府) 남부 지역에 해당한다. 율령제(律令制)하의 행정 구획인 율령국(令制国) 가운데 하나이며,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헤이안쿄)가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명칭의 유래와 변천

원래 이 지역은 같은 발음인 '야마시로'를 한자로 '山代'로 표기하였으며, 7세기경에는 '山背'라는 표기로 구니가 세워졌다. 헤이조쿄가 수도였던 시대의 목간에는 '山代'와 '山背' 두 표기가 병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엔랴쿠 13년(794년) 11월 8일, 간무 천황이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헤이안쿄라고 개칭하면서, 산과 강이 겹겹이 에워싼 지형이 천연의 성(城)과 해자와 같다 하여 '山城'으로 표기를 개칭하였다. 이 때문에 본래 '조(ジョウ)' 또는 '키(き)'로 읽히던 '城'자가 '시로(しろ)'로도 읽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조슈(城州), 산슈(山州), 요슈(雍州) 등이 있다. 요슈라는 이름은 중국 당(唐)의 수도 장안(長安)에 있었던 옹주(雍州)의 명칭에서 따온 것이다.

지위와 행정

《엔기시키(延喜式)》에서는 야마시로국을 상국(上國)으로 규정하였다. 고쿠후(國府, 행정 중심지)는 처음에는 소라쿠군(相樂郡, 현재의 교토부 야마시로정 카미코마)에 있다가, 797년에는 카즈노군·오토쿠니군(나가오카쿄 남부), 861년에는 오토쿠니군(현재의 오야마자키정)으로 차례로 옮겨졌다. 이러한 고쿠후의 이전은 천도(遷都)의 영향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무가 정권이 성립되면서 슈고(守護)가 설치되었는데, 교토의 슈고가 야마시로국의 슈고를 겸임하는 형태였다. 이후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가 야마시로국 슈고의 임무를 겸무하게 되면서 중심 소재지는 로쿠하라로 옮겨갔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우지강을 경계로 상3군과 하5군으로 나뉘어 각각 슈고다이가 임명되었다.

주요 시설

고쿠분지(國分寺)는 소라쿠군에 있었다. 구니노미야(國宮)의 다이고쿠덴(大極殿)이 746년에 절로 바뀌어 승사(僧寺)로 지정되었으나, 882년에 소실된 뒤 재건되었고 이후 쇠퇴하여 가마쿠라 시대에는 뵤도인(平等院)의 말사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기즈가와시 가모정 예폐의 구니노미야 터에 거대한 금당지와 탑지가 남아 있다. 니사(尼寺)는 키즈강변의 가모정 홋케지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925년 절터 부근에서 대량의 기왓조각이 발굴되었다.

이치노미야(一宮)는 교토의 가모 신사, 즉 가미가모 신사(가모와케이라즈치 진쟈)와 시모가모 신사(가모미오야 진쟈)이다. 다른 지방의 구니들과 달리 야마시로국의 이치노미야 지정에는 신기관(神祇官)이 파견된 것으로 보이며, 기나이에서는 12세기가 되어서야 이치노미야 지정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니노미야(二宮) 이하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

무로마치 시대 후기인 분메이 17년(1485년), 남부 야마시로의 농민들이 우지의 뵤도인에 모여 두 하타케야마(畠山) 세력의 영향을 배제하고 남부 야마시로의 자치를 의결하였다. '36인방'이라 불린 농민 대표들에 의해 자치가 이루어져 남부 야마시로는 8년 이상 자치적인 정치 형태를 유지했다.

야마시로국은 1871년의 폐번치현(廢藩置縣) 과정에서 행정 구역으로서 소멸되었으며, 그 영역은 현재의 교토부 남부 지역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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