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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번

야마가타번(山形藩, 야마가타한)은 일본 에도 시대에 존재했던 번(藩) 가운데 하나로, 데와국(出羽国) 무라야마군(村山郡)의 야마가타성(山形城)을 거점으로 하였다. 현재의 야마가타현 야마가타시에 해당한다. 에도 시대 내내 번주 가문이 빈번하게 교체된 것으로 유명하며, 이는 일본 역사학에서 널리 연구된 실제 역사적 개념이다.

개요

야마가타번은 에도 시대의 번 가운데 하나로, 처음에는 전국시대부터 이 지역을 지배하던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인 모가미 가문(最上氏)이 다스렸다. 그러나 모가미 가문이 개역(改易)된 이후에는 막부 요직에서 실각한 인물들이 좌천되는 지역이자 막부의 동북 지방 방위 요충지 역할을 하면서, 친번(親藩)·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 가문들이 매우 빈번하게 교체되었다. 에도 시대 동안 야마가타번의 주인은 총 12개 가문이 바뀌었다고 알려져 있다.

역사

모가미 가문 시대 (1600년~1622년)

야마가타번의 초대 번주는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이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에서 도쿠가와 편에 가담하여 오키타마군(置賜郡)을 제외한 오늘날의 야마가타현 전역과 아키타현 일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의 영지는 57만 석(일부 기록에서는 52만 석 또는 그 이하라는 설도 있음)에 달하는 대번이었다.

그러나 1622년(겐나 8년), 3대 번주 모가미 요시토시(最上義俊) 때에 '모가미 소동'(最上騒動)이라고 불리는 가문 내 분쟁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모가미 가문은 개역되어 오미국(近江国) 오모리번(大森藩) 1만 석으로 삭감 전봉되었다. 모가미 가문의 실제 영지 규모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상이하여, 21만 석설, 51만 석설, 57만 석설 등이 공존한다.

도리이·호시나 가문 시대 (1622년~1643년)

모가미 가문이 개역된 같은 해, 도리이 다다마사(鳥居忠政)가 22만 석(후에 24만 석으로 조정)으로 야마가타의 새로운 영주가 되었다. 도리이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인 후시미성 전투에서 전사한 도리이 모토타다의 적자로, 막부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2대 번주 도리이 다다쓰네(鳥居忠恒)가 1636년(간에이 13년)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말기양자 금지 조항에 위배되어 도리이 가문은 개역되었다. 이후 막부는 도리이 모토타다의 공적을 고려하여 다다쓰네의 이복동생에게 신슈 다카토번(高遠藩) 3만 석을 주어 가문을 이어가게 했다.

같은 해, 다카토번주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가 20만 석으로 야마가타로 옮겨왔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아들이자 3대 쇼군 이에미쓰의 이복동생이었다. 그는 행정 제도를 정비하고 가문 규율을 제정하는 등 민정에 힘썼으나, 1643년 23만 석으로 가봉된 뒤 아이즈번(会津藩)으로 옮겨갔다.

이후의 번주 교체 (1644년~1767년)

호시나 가문 이후에도 야마가타번의 영주는 계속해서 교체되었다.

  • 마쓰다이라 나오모토(結城松平家)가 1644년 15만 석으로 입봉, 1648년 히메지번으로 전봉
  • 마쓰다이라 다다히로(奥平松平家)가 15만 석으로 입봉, 1668년 우쓰노미야번으로 전봉
  •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이 우쓰노미야에서 9만 석으로 입봉, 1685년 다시 우쓰노미야로 복귀

이 시기부터 야마가타번은 대략적으로 막부 중진의 좌천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684년 다이로(大老) 홋타 마사토시가 암살되자, 그 아들 홋타 마사나카가 좌천되어 10만 석으로 입봉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마쓰다이라 나오노리,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 홋타 가문 등이 번갈아 입봉과 전봉을 반복했다. 홋타 가문은 1700년부터 1746년까지 46년간 통치하여 야마가타번 역사상 두 번째로 오래 재임한 가문이 되었다.

아키모토 가문 시대 (1767년~1845년)

1746년부터 1764년까지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이 통치한 뒤, 1764년부터 3년간 막부 직할령으로 남았다. 1767년(메이와 4년), 아키모토 가문(秋元氏)이 6만 석으로 입봉하여 4대 78년간 야마가타를 통치하였다. 이는 야마가타번의 역대 번주 가문 가운데 가장 오래 지속된 것이었다. 아키모토 가문은 1845년(고카 2년)에 다테바야시번(館林藩)으로 옮겨갔으며, 이때 우루시야마(漆山) 4만 6천 석 영지는 다테바야시번의 소유가 되었다.

미즈노 가문 시대와 번의 종말 (1845년~1870년)

1845년, 하마마쓰번에서 미즈노 가문(水野氏)이 5만 석으로 입봉하였다. 이는 덴포 개혁(天保の改革)에 실패해 실각한 미즈노 다다쿠니의 아들인 미즈노 다다키요(水野忠精)가 좌천되어 들어온 것이었다. 미즈노 가문은 2대에 걸쳐 통치하다가 메이지 시대를 맞이했다.

보신 전쟁(戊辰戦争)이 발발하자 야마가타번은 요네자와번, 센다이번 등과 함께 오우에쓰 열번동맹(奥羽越列藩同盟)에 참가했으나, 동맹의 주요 번들이 항복하는 가운데 야마가타번도 1868년 9월(게이오 4년) 신정부군에 항복했다. 1870년(메이지 3년), 미즈노 가문은 오미국 아사히야마번(朝日山藩) 5만 석으로 전봉되었고, 야마가타번은 폐지되어 메이지 정부 직할령이 되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최종 소멸하였다.

경제와 문화

야마가타번은 역대 영주 가문의 빈번한 교체로 인해 대번(大藩) 특유의 정비된 성하도시 문화는 크게 발달하지 못했지만, 상업 도시로서는 크게 번영하였다. 야마가타는 홍화(紅花), 옻(漆), 청마(青麻)의 전국적인 집산지였으며, 일본 동북 지방 각지에서 참배객이 모여든 데와 삼산(出羽三山) 참배의 기점 도시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초의 번주 모가미 요시아키가 실시한 성하도시 정비, 쇼나이 지역의 개간, 모가미가와강(最上川)의 수로 공사 등 인프라 구축은 이후 모가미가와 수운을 크게 활성화시켰고, 사카타(酒田)를 기점으로 하는 서회항로(西廻り航路)와 동회항로(東廻り航路)의 정비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요시아키의 상업 진흥 정책으로 우슈 가도(羽州街道)를 따라 많은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역대 번주 가문 요약

야마가타번의 역대 번주 가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모가미 가문 (外様, 57만 석 추정, 1600년~1622년)
  2. 도리이 가문 (譜代, 22만~24만 석, 1622년~1636년)
  3. 호시나 가문 (親藩, 20만 석, 1636년~1643년)
  4. 유우키 마쓰다이라 가문 (親藩, 15만 석, 1644년~1648년)
  5.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 (親藩, 15만 석, 1648년~1668년)
  6. 오쿠다이라 가문 (譜代, 9만 석, 1668년~1685년)
  7. 홋타 가문 (譜代, 10만 석, 1685년~1686년)
  8. 유우키 마쓰다이라 가문 (친번, 9만~10만 석, 1686년~1692년)
  9. 오쿠다이라 마쓰다이라 가문 (親藩, 10만 석, 1692년~1700년)
  10. 홋타 가문 (譜代, 10만 석, 1700년~1746년)
  11. 오규 마쓰다이라 가문 (譜代, 6만 석, 1746년~1764년)
  12. 아키모토 가문 (譜代, 6만 석, 1767년~1845년)
  13. 미즈노 가문 (譜代, 5만 석, 1845년~1870년)

(단, 1764년~1767년은 막부 직할령이었다. 각 가문의 정확한 석고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부속 번

야마가타번과 관계가 깊은 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오모리번(大森藩): 1622년 개역된 모가미 요시토시가 오미국에 1만 석으로 입봉하여 세운 번이다. 이후 아들이 불과 1세였던 관계로 5천 석의 교체 기리가 되어 소멸했다.
  • 아사히야마번(朝日山藩): 1870년 야마가타번이 폐지되면서 미즈노 가문이 오미국으로 전봉되어 약 1년간 존재한 번이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소멸했다.

참고 사항

본 항목에서 제시된 정보는 한국어 및 일본어 위키백과, 야마가타시 공식 자료 등 공신력 있는 출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다만, 모가미 가문의 초기 영지 규모(21만 석설, 51만 석설, 57만 석설 등)처럼 일부 수치에 대해서는 사료에 따라 기록이 상이하여 특정 수치를 단정적으로 표기할 수 없다. 해당 부분은 백과사전 정보의 한계로 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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