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 디킨(Alfred Deakin, 1856년 8월 3일 ~ 1919년 10월 7일)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가이자 법정 변호사로, 1903년부터 1904년, 1905년부터 1908년, 1909년부터 191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오스트레일리아의 제2대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앨프리드 디킨"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이는 영어 이름 Alfred Deakin에 대한 한글 표기이다.
생애 초기와 정치 입문
디킨은 1856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멜버른 그래머 스쿨과 멜버른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변호사와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1879년 23세의 나이로 빅토리아 주의회 의원에 선출되었고, 1883년부터 빅토리아 주 법무부 차관을 지냈으며 이후 법무부 장관을 두 차례 역임했다. 자유주의 및 급진적 개혁 세력과 함께 활동하였다.
연방 설립 운동
1890년대에 디킨은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 연방(연맹) 운동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연방 대회의 대표로 활동했으며, 연방 헌법 초안 작성 위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헌법안의 채택을 위해 일련의 국민투표에서 캠페인을 벌였고, 영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로비 활동에도 참여했다.
총리 재임
1901년 연방이 성립된 이후 디킨은 초대 총리 에드먼드 바턴이 이끄는 내각에서 초대 법무장관을 지냈다. 1903년 9월 바턴의 뒤를 이어 총리에 취임했다. 1903년과 1906년 두 차례의 선거에서 세 정당이 균등하게 분열된 가운데, 디킨의 자유보호당은 자유 무역당과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ALP) 사이의 중간 지점을 차지했다.
- 제1차 임기: 1903년 9월 ~ 1904년 4월 (단기간에 퇴임)
- 제2차 임기: 1905년 7월 ~ 1908년 11월 (노동당의 지원을 받아 내각 구성)
- 제3차 임기: 1909년 6월 ~ 1910년 4월
1909년에는 "퓨전(Fusion)"으로 알려진 연합을 이끌며 지지자들을 자유 무역 연합과 결합시켰고, 반사회주의에 기초한 이 동맹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정치에서 양당제의 시작을 알렸으며 최초의 다수당 내각을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10년 선거에서 ALP가 양원 모두에서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디킨은 정권을 내주었다.
정치적 유산
디킨은 호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총리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는 백호주 정책, 강제 중재 제도, 보호주의, 국가 온정주의, 대영 제국에 대한 지지 등의 특징을 지닌 이른바 "호주 정착(Australian Settlement)" 체제의 주요 설계자였다. 이러한 정책 틀은 20세기 오스트레일리아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은퇴와 사망
디킨은 퇴행성 신경 질환으로 인해 1913년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1919년 10월 7일 멜버른에서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디킨의 이름은 빅토리아주에 위치한 디킨 대학교(Deakin University)에 붙여져 그를 기리고 있다.
참고: "앨프리드 디킨"(Alfred Deakin)이라는 표기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가를 지칭하며,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1812~1870)의 아들인 알프레드 디킨스(Alfred D'Orsay Tennyson Dickens, 1845~1912) 등 다른 동명이인과는 별개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