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실로마 회의(Asilomar Conference on Recombinant DNA)는 1975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실로마(Asilomar)에 위치한 애실로마 컨퍼런스 센터에서 개최된 국제 회의이다. 유전자 재조합 기술의 잠재적 위험성과 생물학적 재해(biohazard) 문제를 논의하고 자발적 안전 지침을 마련하기 위해 열렸다.
배경
재조합 DNA 기술은 서로 다른 종(species) 유래의 DNA를 결합하고, 이를 숙주 세포에 삽입하는 기술을 말한다. 1970년대 초 스탠퍼드 대학의 생화학자 폴 버그(Paul Berg)가 이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원숭이 바이러스 SV40의 DNA를 박테리오파지 람다의 DNA와 결합하고 이를 대장균(E. coli)에 이식하는 실험을 설계했다. 그러나 SV40이 쥐에게 암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대장균이 인간의 장관에 서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동료 연구자들이 생물학적 위험을 우려하며 실험의 마지막 단계 수행을 중단하도록 요청했다.
이러한 우려를 바탕으로 1974년 미국 국립과학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s) 산하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 위원회는 국제 회의의 필요성을 결의하면서 그때까지 재조합 DNA 관련 실험을 중단할 것을 권고했다.
회의의 내용
애실로마 회의에는 주로 생물학자들로 구성된 약 140여 명의 전문가가 참석했으며, 변호사와 의사들도 포함되었다. 회의의 주요 목표는 재조합 DNA 기술이 제기하는 생물학적 위험을 다루고, 해당 기술을 안전하게 수행하기 위한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회의에서 확립된 원칙으로는, 실험 설계 시 봉쇄(containment)가 필수 고려 사항이 되어야 한다는 점과, 봉쇄의 수준이 추정된 위험도와 가능한 한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는 점이 포함되었다. 또한 병원체 및 비전달성 벡터(plasmid, bacteriophage 등)를 활용한 생물학적 장벽, 후드 사용이나 음압 실험실 등 물리적 봉쇄, 그리고 엄격한 미생물 실험 관행 준수 등 안전 조치가 권고되었다.
회의는 실험 유형별로 최소, 저위험, 중간위험, 고위험으로 나누어 각각에 적합한 봉쇄 수준을 제시했다. 또한 고병원성 생물체 유래 DNA의 클로닝, 독소 유전자의 클로닝, 인체·동물·식물에 잠재적으로 유해한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대규모 실험은 금지되었다.
회의의 의미와 영향
애실로마 회의에서 마련된 자발적 지침은 이후 미국 연방정부 차원의 공식 지침 및 규제 체계로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 과학자들은 지침에 따라 재조합 DNA 실험을 재개했으며, 이는 1980년 폴 버그, 월터 길버트, 프레더릭 생어가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등 분자생물학 분야의 급속한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 회의는 과학 연구가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로 평가된다. 일부 학자들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정부 비밀주의에 대한 사회적 경계심이, 애실로마 회의에서 과학자들이 연구 내용을 공개적으로 논의하고자 한 동기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회의의 또 다른 유산은 새롭게 등장하는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위험성에 대응하는 방식에 대해 선례를 확립한 것이다. 즉, 새로운 지식의 위험에 대응할 때 정보를 은폐하기보다 관련 지침을 개발하고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방식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이후 신기술 규제 논의의 모델로 자주 인용된다. 최근에는 유전자 편집 기술이나 인공지능(AI)과 같은 신기술의 안전성 논의에서도 애실로마 회의의 원칙이 참고되곤 한다.
기타 참고사항
애실로마라는 지명은 이후에도 다양한 학술 회의의 개최지로 사용되었으며, 애실로마 컨퍼런스 센터에서는 신호·시스템·컴퓨터 분야 연례 회의(Asilomar Conference on Signals, Systems, and Computers) 등 여러 독립적인 회의가 개최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애실로마 회의"라고 할 때는 1975년의 재조합 DNA 회의를 지칭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