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태도 소작쟁의(巖泰島小作爭議)는 1923년 12월부터 1924년 8월까지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에서 소작농민들이 지주와 일제에 대항하여 벌인 조직적 농민항쟁이다. 한자 표기는 巖泰島小作爭議이며, 영문으로는 Amtae Island Tenancy Dispute로 표기된다.
배경
일제강점기 암태도는 농업 인구가 전체의 약 94%를 차지할 정도로 농업 중심의 섬이었다. 그러나 토지의 대부분은 소수의 지주가 독점하고 있었으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문재철(文在喆)이었다. 문재철은 암태도·자은도 등 도서 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일대와 전라북도 고창 등지에 총 755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1923년 당시 암태도에서만 논 98정보, 밭 42정보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920년대 일제의 저미가 정책(低米價政策)으로 지주의 수익이 감소하자, 문재철은 소작료를 기존의 5할에서 7~8할까지 인상하여 징수하였다.
한편 3·1운동 이후 암태도에서는 민족의식이 고양되면서 1920년대 초 박복영(朴福永)을 중심으로 암태청년회가, 1922년 고백화(高白花)를 중심으로 암태부인회가 결성되는 등 사회단체가 활발히 조직되었다.
전개 과정
1923년 8월, 만주와 목포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향한 서태석(徐邰晳)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巖泰小作人會)가 조직되었다. 1923년 12월 4일 창립총회에서는 소작료를 논 4할, 밭 3할로 인하할 것과, 요구에 응하지 않는 지주에 대해서는 소작료 불납동맹 및 파작(罷作)을 단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대다수 지주들은 이를 수용하였으나,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문재철이 끝까지 거부하면서 쟁의는 소작인회와 문재철 일가의 대립 구도로 발전하였다.
1924년 3월 27일 면민대회에서 소작인회는 문재철이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그의 아버지 문태현의 송덕비를 파괴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주 측과 소작인들 간에 충돌이 발생하였고, 1924년 4월 22일 송덕비가 실제로 파괴되었다. 목포경찰서는 이를 빌미로 서태석 등 소작인회 간부 13명을 구속하였다.
이에 암태도 주민들은 1924년 6월 4일부터 8일까지 400여 명이 목포경찰서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앞에서 시위농성을 벌였다. 이어 7월 8일부터는 600여 명이 목포로 진출하여 '아사동맹(餓死同盟)'을 결성하고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70세 노인과 젖먹이를 안은 부인들도 함께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과 및 영향
암태도 소작쟁의가 전국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서울·평양 등지에서 지원 활동이 이어지자, 일제는 확산을 막기 위해 중재에 나섰다. 1924년 8월 30일 목포경찰서장실에서 전라남도 경찰국 고등과장 고가(古賀)의 중재로 지주 문재철과 소작인 대표 박복영 간에 다음과 같은 타협이 이루어졌다: ① 소작료를 4할로 약정하고 지주는 소작인회에 2,000원을 기부, ② 1923년 미납 소작료는 3년간 분할 상환, ③ 구금 중인 쌍방 인사에 대해 고소 취하, ④ 파괴된 송덕비는 소작인회 부담으로 복구. 이로써 약 1년간의 쟁의는 소작인 측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이후 서해안 도서 지역의 소작쟁의를 촉발하여 1925년 도초도(都草島) 소작쟁의, 1926년 자은도(慈恩島) 소작쟁의, 1927년 지도(智島) 소작쟁의로 이어졌다. 한국 농민운동사에서 조직적 항쟁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되며, 단순한 경제 투쟁을 넘어 항일 민족 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분석된다. 2003년에는 쟁의를 주도한 서태석이 사후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