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키비아데스(Alcibiades, 고대 그리스어: Ἀλκιβιάδης, 기원전 450년경~기원전 404년경)는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장군이다. 그의 정식 이름은 알키비아데스 클레이니우 스캄보니데스(Ἀλκιβιάδης Κλεινίου Σκαμβωνίδης)이다.
가문과 성장 배경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이의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클레이니아스는 부유한 귀족으로, 기원전 447년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전사했다. 어머니 데이노마케는 알크마이오니다이(Alcmaeonidae) 가문 출신으로, 아테나이의 저명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와 친족 관계였다. 아버지 사후 알키비아데스의 후견인은 페리클레스와 그의 형제 아리프론이 맡았다.
알키비아데스는 젊은 시절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과 《알키비아데스 I》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가르쳤으나, 알키비아데스의 오만하고 방탕한 성격을 제어하지는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활동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 시기에 활동했다. 기원전 421년 니키아스 평화조약으로 아테나이와 스파르타가 휴전한 후, 알키비아데스는 주전론을 주창하며 전쟁 재개를 주도했다. 그는 아르고스, 엘리스, 만티네이아 등과 반스파르타 동맹을 결성했으나, 기원전 418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동맹군은 스파르타에 패배했다.
기원전 415년, 알키비아데스는 시켈리아(시칠리아) 원정을 제안하고 이를 추진했다. 그의 목표는 시켈리아 섬의 강력한 도시국가 시라쿠사를 정복하여 아테나이의 패권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는 니키아스와 함께 원정군의 공동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헤르메스상 훼손 사건과 스파르타 망명
원정군 출항 직전, 아테나이 시내의 헤르메스 신상(헤르마이)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은 그를 사건의 주모자로 고발했으며, 신성모독 혐의가 제기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즉각적인 재판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원정 도중 귀국 명령이 내려졌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그는 아테나이로 돌아가지 않고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스파르타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이에 대한 전략적 조언을 제공했다. 그는 아티카 지역의 데켈레이아에 요새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고, 이는 아테나이의 농촌과 곡물 보급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또한 그는 스파르타군이 시켈리아 방어를 강화하도록 조언했으며, 그 결과 아테나이의 시켈리아 원정은 궤멸적인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스파르타에서도 알키비아데스는 정적을 만들었다. 스파르타 왕 아기스 2세의 왕비와의 불륜 의혹 등으로 인해 그는 다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페르시아 제국으로 도주했다.
페르시아 망명과 아테나이 귀환
페르시아에서 알키비아데스는 태수(사트라프) 티사페르네스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타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여 페르시아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제안했다. 또한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전복하려는 과두파와 접촉하며, 페르시아의 재정 지원을 약속하는 대가로 자신의 복귀를 모색했다.
기원전 411년 아테나이에서 400인 평의회에 의한 과두정 변혁이 일어났다. 과두정이 붕괴된 후, 사모스 섬에 주둔 중이던 아테나이 해군은 알키비아데스를 장군으로 선출했다. 그는 기원전 410년 아비도스 해전과 키지코스 해전에서 스파르타 함대를 격파하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408년,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이로 귀환하여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모든 혐의에서 사면되었고 전군의 총사령관직을 부여받았다.
최후
기원전 407년, 알키비아데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부하 장군이 노티온 해전에서 스파르타 함대에 패배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적들이 그를 공격했고, 알키비아데스는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그는 트라키아(트라케) 지역의 자신의 성으로 은퇴했다.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나이 함대가 전멸한 후, 알키비아데스는 프리기아로 피신했다. 기원전 404년경, 스파르타의 요청을 받은 페르시아 측 인물에 의해 프리기아에서 암살당했다. 사료에 따라 암살 주체와 방식에 대한 세부 묘사에는 차이가 있다.
역사적 평가
알키비아데스는 외모, 언변, 군사적 재능, 정치적 카리스마 등 여러 면에서 뛰어난 인물로 평가된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그의 재능과 야망을 객관적으로 서술했으며,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그의 극적인 생애와 모순된 성격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잦은 정치적 변절과 소신 없는 행보는 그를 '배신자'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아테나이, 스파르타, 페르시아 사이를 오가며 각각의 편에 서서 활동한 그의 행적은 개인적 야망과 명예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그의 행동을 아테나이 민주정의 구조적 모순과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의 전략적 선택으로 보는 시각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