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마리아 포르스터(Albert Maria Forster, 1902년 7월 26일 ~ 1952년 2월 28일)는 독일의 나치당 정치인이자 슈츠슈타펠(SS) 구성원, 전쟁 범죄자이다.
생애 초기
포르스터는 독일 바이에른주 퓌르트(Fürth)에서 여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08년부터 1920년까지 퓌르트의 인문계 김나지움에서 수학한 뒤 은행 업무를 익혀 1922년부터 지역 은행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23년 11월 나치당에 가입하여 퓌르트 지역 지부장이 되었고, 동시에 돌격대(SA)에 입대했다. 1924년 5월 반유대주의 활동을 포함한 나치 활동 때문에 은행에서 해고되었다. 이후 나치당이 금지된 시기에는 전위조직인 대독일민족공동체(Großdeutsche Volksgemeinschaft)에 가입하여 지역 지도자를 맡았다. 이 시기에 북부 바이에른의 당 지도자였던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와 친분을 맺고, 그가 발행한 반유대주의 주간지 《데어 슈튀르머》(Der Stürmer)에서 파트타임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5년 2월 히틀러가 나치당을 재건했을 때 포르스터는 다시 퓌르트 지역 조직 책임자가 되었고, 4월 5일 당에 공식적으로 재가입했다(당원 번호 1,924). 초기 당원으로서 그는 '알터 켐퍼'(Alter Kämpfer, 원로 전사)로 간주되어 황금 당원 휘장을 수여받았다. 1926년 5월 12일 SS에 가입하여 7월에 뉘른베르크-퓌르트 SS 집단을 창설·지휘했다. 1928년 2월부터는 민족주의적·반유대주의적 성격의 노동조합인 독일상업사무원연합(DHV)에서 급여사무관으로 근무했다. 1930년 9월 선거에서 독일 국회(라이히스타크)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당시 최연소 의원이었다.
단치히 자유시에서의 활동
1930년 10월 15일, 포르스터는 나치당의 단치히 자유시 가울라이터(Gauleiter, 지역 당 지도자)로 임명되어 아르투어 그라이저를 대체했다. 그라이저는 이후 부가울라이터가 되었으며, 두 사람 사이의 반목은 평생 이어졌다. 단치히 지역민 다수는 토착 단치히 출신인 그라이저를 대신해 외부인인 포르스터를 불쾌하게 여겼다. 포르스터는 즉시 공격적인 선전 활동과 당원 모집을 시작했으며, 1930년 11월에는 신문 《단치히 관찰자》(Danziger Beobachter)를 창간했다. 1930년 12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단치히 지역 나치당 당원 수는 1,310명에서 9,519명으로 증가했고, 지역 SA는 150명에서 1,500명으로 늘었다.
나치당이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한 뒤, 포르스터는 1933년 봄 단치히에서 나치당이 원내 과반을 차지하게 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34년 5월 게르트루트 데에츠와 결혼했는데, 결혼식은 베를린 총리실에서 열렸고 히틀러와 루돌프 헤스가 증인으로 참석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점령지 통치
1939년, 베를린의 지시에 따라 포르스터는 독일 병합을 위한 단치히 지역의 선동 활동을 주도했다. 8월 23일에는 단치히 자유시의 국가수반이 되었다. 단치히 문제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1939년 9월)의 구실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직후, 포르스터는 9월 8일 단치히-서프로이센 군사구역의 민정청장으로 임명되었고, 해당 지역이 10월 8일 독일 제국에 병합된 뒤에는 10월 21일 새로 창설된 단치히-서프로이센 라이히스가우(Reichsgau)의 가울라이터이자 라이히슈타트할터(제국총독)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로써 해당 지역에서 당과 국가의 최고 직위를 동시에 장악했다. 1941년 12월 31일 SS-오버그루펜퓌러로 승진했다.
학살과 인종청소 정책
포르스터는 점령지 폴란드인과 유대인에 대한 학살 정책에 직접적인 책임을 졌다. 그는 폴란드인에 대해 "이 민족을 요람에서부터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발언을 반복했다. 포메라니아 지역에는 폴란드인을 위한 약 70개의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수용소에서는 살해, 고문, 여성에 대한 강간 후 처형 등이 자행되었다.
1939년 9월 10일에서 15일 사이, 포르스터는 지역 최고 나치 관리 회의를 소집하여 모든 '위험한' 폴란드인, 모든 유대인, 모든 폴란드 성직자의 즉각 제거를 명령했다. 일부 사례에서는 포르스터가 직접 처형을 명령하기도 했다. 10월 19일에는 그루지옹츠 시의 나치 관리들이 "폴란드인의 피를 충분히 흘리지 않았다"며 질책했다.
피아시니차(Piaśnica) 대학살에도 포르스터의 책임이 지적된다. 1939~1940년 겨울 동안 약 12,000명에서 16,000명의 폴란드인, 유대인, 체코인, 카슈브인, 심지어 독일인이 이 지역에서 살해되었다. 포르스터는 바이헤로보의 호텔 연설에서 독일계 주민들에게 폴란드인 공격을 선동했으며, 이에 따라 현장의 군중은 "폴란드 개들을 죽여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도 포르스터는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며 해충처럼 근절되어야 한다"는 극단적 발언을 했다. 전쟁 초기에 단치히-서프로이센 지역의 유대인들은 살해되거나 총독부(General Government)로 추방되었고, 1939년 11월까지 해당 지역은 '유대인 없는 지역'(Judenfrei)으로 선언되었다.
포르스터의 게르만화 정책은 폴란드인에게 절멸 또는 강제 동화의 두 가지 선택만을 제시했다. 그는 독일 혈통을 주장하는 폴란드인을 서류 검증 없이 전면적으로 독일인으로 분류하는 관대한(?) 정책을 폈다. 반대로 독일인 정체성을 거부하는 것은 총독부로의 추방이나 강제수용소 수감의 이유가 되었다. 그의 관대한 분류 정책은 SS와의 갈등을 초래했는데, 바르테가우의 가울라이터 아르투어 그라이저와 하인리히 힘러가 나치 인종 이론에 위배된다며 항의했으나, 히틀러가 각 가울라이터가 자기 지역을 스스로 운영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포르스터는 이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었다.
전쟁 종료 시점까지 단치히-서프로이센 지역에서는 최대 60,000명이 살해되고 35,000명에서 170,000명이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 포르스터 자신은 1940년 2월까지 87,000명이 지역에서 '소개(疏開)'되었다고 보고했다.
재판과 처형
전쟁이 끝난 뒤 포르스터는 독일 영국 점령지역으로 도피했으나, 1945년 5월 영국군에 의해 폴란드 공화국에 인도되었다. 1948년 5월 폴란드 최고국민재판소에서 전쟁 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단스크에서 바르샤바의 모코투프 교도소로 이송되었으며, 1952년 2월 28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아내는 1949년 이후 남편의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1954년에야 그의 사망 소식을 통보받았다.
포르스터는 1939년 침공 당시 SS 향토방위군(SS-Heimwehr) 단치히 창설을 제안한 인물이기도 하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점령지에서 자행된 인종 청소와 대량 학살 정책의 주요 실행자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