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그리스어: Ἀντίοχος Δ΄ Ἐπιφανής, 기원전 215년경 – 기원전 164년)는 헬레니즘 시대의 셀레우코스 제국 제8대 군주로, 기원전 175년부터 기원전 164년까지 통치했다. 그의 이름 에피파네스(Epiphanes)는 "신이 현현한 자" 또는 "빛나는 자"라는 의미이지만, 그의 행동을 비난하는 이들에 의해 "광인"이라는 뜻의 에피마네스(Epimanes)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특히 유대교에 대한 탄압과 이로 인해 발생한 마카베오 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생애와 즉위
안티오코스 4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대왕)의 아들이자,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의 동생이다. 그는 젊은 시절 로마-시리아 전쟁의 결과로 로마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기원전 175년, 그의 형 셀레우코스 4세가 재상 헬리오도로스에게 암살당하자, 안티오코스는 로마에서 돌아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셀레우코스 4세의 어린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를 제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통치와 대외 정책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의 치세 동안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노력했으며, 헬레니즘 문화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그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관계에 깊이 관여하여 두 차례의 대규모 군사 원정(제6차 시리아 전쟁)을 감행했다. 특히 기원전 168년에는 이집트의 거의 전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로마 공화정의 개입(엘레우시스의 날 사건)으로 인해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로마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유대인 탄압과 마카베오 항쟁
안티오코스 4세의 통치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부분은 유대인에 대한 정책이었다. 그는 헬레니즘 문화를 제국 전역에 강제로 확산시키려 했으며, 이는 유대교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 성전 약탈 및 모독: 기원전 169년,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막대한 보물을 빼앗았다. 기원전 167년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이교적인 신전으로 바꾸고 제우스 신상을 봉헌하며 돼지 피를 제물로 바치는 등의 행위를 통해 성전을 모독했다.
- 유대교 의례 금지: 그는 할례, 안식일 준수, 율법서 소유 및 연구, 유월절 등 유대교의 핵심 의례를 모두 금지했다. 이를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 헬레니즘 강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식 생활 방식을 따르고 이교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극심한 탄압은 유대인들 사이에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마카베오 가문의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한 마카베오 항쟁(기원전 167년-기원전 160년)이 발발했다. 마카베오 항쟁은 결국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정화하여 유대교 의례를 회복하는 결과(하누카 축제의 기원)를 낳았다.
말년과 사망
마카베오 항쟁이 한창이던 중, 안티오코스 4세는 제국의 동방 속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페르시아 지역으로 원정을 떠났다. 그는 이 원정 도중 기원전 164년, 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열병, 정신병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죽음은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겨졌다.
평가
안티오코스 4세는 강렬한 개성과 비전을 가진 군주였으나, 과도한 헬레니즘 강요와 유대교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인해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통치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유대인 역사에서는 다니엘서의 "작은 뿔"이나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 등의 예언적 인물로 해석되기도 하며, 유대교의 독립 정신을 고취시킨 역설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그의 죽음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은 내부 분열과 로마의 압력 속에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