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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코쿠지 에케이

안코쿠지 에케이(일본어: 安国寺恵瓊, 1539년? ~ 1600년 11월 6일)는 일본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 활동한 승려이자 다이묘이다. 본명은 요호 에케이(瑶甫恵瓊)이며, '안코쿠지'라는 명칭은 성이 아니라 그가 주지로 있던 아키국(지금의 히로시마현)의 안코쿠지(安国寺)라는 사찰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키 다케다 씨(安芸武田氏)의 후손으로, 1541년 모리 모토나리의 공격으로 가문이 멸문되자 가신에 이끌려 탈출하여 아키의 안코쿠지로 출가하였다. 이후 교토의 도후쿠지에서 지쿤 엔신의 제자가 되었고, 1574년 아키 안코쿠지의 주지가 된 후 도후쿠지와 난젠지의 주지까지 역임하며 중앙 선종 사찰의 최고 직위에 올랐다.

주고쿠 지방의 대세력이었던 모리 씨의 외교승으로 활약하였으며, 1570년에는 모리 씨와 대립하던 분고의 오토모 소린과의 화친을 성사시켰다. 1582년 하시바 히데요시(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고쿠 정벌 중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히데요시의 화친 제안을 수락하였고 이후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었다. 1585년 이요국 내 2만 3천 석의 영지를 하사받았으며, 규슈 정벌 이후 6만 석으로 가증되어 다이묘의 지위에 올랐다. 히데요시의 측근으로서 전국에서 시행된 검지(토지조사)의 실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휘하 부대에 속하여 조선에 파병되었으며, 웅치 전투와 정암진 전투 등을 지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문장이 뛰어나고 관직이 높았으며, 임진왜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시에 따랐다고 전해진다. 또한 웅치 전투 후 조선군의 유해를 모아 무덤을 만들고 '조선국의 충신 의사들의 영혼을 조상하노라'는 표목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를 도와 서군에 참전하였고, 모리 데루모토를 설득하여 서군 총대장으로 옹립하는 데 조력하였다. 전투 후 도주하였으나 교토에서 도쿠가와군에 포박되어 서군 수괴 중 한 명으로 로쿠조가와라에서 참수되었다. 향년 62세 또는 64세였다.

묘소는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의 겐닌지에 목무덤이,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히가시구의 후도인에도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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