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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 모토지로

아카시 모토지로(일본어: 明石 元二郎, 1864년 9월 1일 ~ 1919년 10월 26일)는 메이지·다이쇼 시대의 일본 제국 육군 군인이며 화족(華族)이다. 최종 계급은 육군 대장이며, 남작(男爵) 작위를 받았다.

생애

1864년(겐지 원년), 후쿠오카번(福岡藩)의 번사(藩士) 아카시 스케쿠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센고쿠 시대의 무장 아카시 테루즈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번교 수유관을 거쳐 188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6기)를 졸업하고, 1889년 육군대학교(5기)를 졸업하였다.

이후 독일 유학,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출장, 미국-스페인 전쟁 참관 등을 거쳐 1901년 프랑스 주재 무관, 1902년 러시아 제국 주재 일본 공사관 무관으로 전임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영국 비밀 정보부의 스파이 시드니 레일리와 교류하며 정보 협력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일 전쟁 시기

러일 전쟁(1904~1905) 발발 후 중립국 스웨덴으로 거점을 옮겨 활동하였다. 당시 참모본부는 아카시(당시 대령)에게 100만 엔(현대 가치로 수백억 엔 이상으로 추정)의 활동 자금을 지급하여 러시아 제국 내부 교란 공작을 수행하게 하였다. 아카시는 러시아 내 반정부 세력, 혁명가, 민족주의 단체 등과 접촉하며 제정 러시아의 후방을 교란하는 첩보전을 전개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레닌, 가폰 신부, 표트르 크로폿킨, 플레하노프, 막심 고리키 등 당시 러시아 내 반체제 인사들과 접촉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토 히로부미는 아카시 혼자서 일본군 10개 사단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총독부 재직

러일 전쟁 종료 후 아카시는 조선으로 이동하여 헌병대 조직에 관여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 경무총장(경무국총감) 겸 주차헌병사령관으로 재임(1910년 7월 ~ 1914년 4월)하였다. 이 시기 그는 조선 내 항일 의병 세력에 대한 탄압 및 헌병 경찰 체제 확립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만 총독 시절

1915년 제6사단장을 거쳐 1918년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였고, 같은 해 제7대 대만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대만 총독 재임 기간(1918년 6월 ~ 1919년 10월) 동안 관개 시설, 전력 공사 등 기반 시설 확충에 힘썼다.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가난(嘉南) 관개 시스템' 건설과 리웨탄(日月潭) 수력발전소 계획이 있다.

사망과 사후

1919년 고향 후쿠오카를 방문하던 중 지병으로 55세에 사망하였다. 유언에 따라 대만에 안장되었으며, 이는 대만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 총독으로 기록된다. 그의 묘는 현재 신타이베이시 싼즈구에 위치해 있다.

저서

러일 전쟁 당시의 공작 활동을 기록한 복명서 《낙화유수》(落花流水)가 유고집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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