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발도(阿只抜都, 또는 阿其拔都, ? ~ 1380년)는 고려 우왕 6년(1380년) 고려에 침입한 왜구(경신년 왜구)를 지휘했던 일본의 무장이다. '아지발도'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고려 측에서 부른 타칭이며, 《용비어천가》에는 한글로 '아기바톨'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명칭의 유래
'아지'는 한국어로 '아기'(어린아이)를 일컫는 말이고, '발도'는 몽골어로 용감무쌍한 사람, 즉 용사를 뜻하는 '바토르'를 한자로 음차 표기한 것으로, 한국어와 몽골어의 합성어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즉 '아기장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남원 현지 전승에서는 전라도 방언 '아구'(아이)를 써서 '아구바따'로 발음되기도 한다.
역사적 배경과 활동
우왕 6년(1380년) 5백여 척의 군세를 갖춘 왜구 선단이 진포(鎭浦, 충청남도 서천 및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에 상륙하여 인근 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진포 해전에서 나세, 최무선 등이 이끄는 고려 수군의 화포 공격으로 배를 모두 잃었으나, 상륙한 병력은 내륙으로 진격하여 옥주, 이산, 영동, 황간, 상주, 선주, 경산부 등 여러 고을을 침략하고 약탈했다.
8월에는 함양 동쪽 사근역에서 고려군과 맞붙어 고려측 원수 박수경, 배언 및 고려군 5백 명이 전사하였다. 9월에는 남원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운봉의 인월역에 진을 치고 다시 남원을 포위했다.
황산대첩과 최후
고려 조정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로 임명하고, 변안열, 왕복명, 우인열 등과 함께 남원에 파견했다. 이성계는 운봉을 넘어 황산(荒山) 서북쪽 정산봉에 진을 쳤다.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의 기록에 따르면, 아지발도는 "나이 겨우 십오륙 세 되는 적장으로 용모가 수려하고 용맹스럽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면서 돌진해 오니, 그가 향하는 곳마다 아군은 쓰러져 감당하지 못했는데 아군이 '아기바톨'이라 부르며 다투어 피했다"고 한다. 또한 아지발도는 얼굴까지 갑옷을 둘러 활을 쏠 만한 틈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투 중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용맹함을 가상히 여겨 이지란에게 생포를 명했으나, 이지란이 "생포하자면 반드시 사람이 다칠 것"이라며 반대했다. 이에 이성계가 직접 활로 아지발도의 투구 꼭지를 쏘아 투구를 벗기고, 뒤이어 이지란이 쏜 화살에 아지발도는 전사했다. 대장을 잃은 왜구는 전의를 상실하고 패퇴하여,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고 지리산까지 달아난 잔병은 70명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이라 한다.
정체에 대한 논의
아지발도의 본명과 정체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 관련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일본에서는 전기무라카미 수군의 잔장이라는 설, 규슈의 무사 아카보시 씨나 아지히 씨의 성을 가진 무장이라는 설, 마쓰라토(松浦党) 소속이라는 설 등이 제기되었으나 모두 추정에 불과하다. 또한 왜구 집단이 일본인뿐 아니라 중국인, 몽골인, 고려인 등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아지발도가 몽골 계통의 탐라(제주도)인이거나 고려인, 류큐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고려사》 변안열열전에 실린 포로 증언에 따르면, 아지발도는 섬(일본)에 있으면서 출정하려 하지 않았는데 왜구들이 그의 무용에 탄복해 지휘관으로 와 달라고 간청하여 고려로 와 왜구를 지휘하게 되었다고 한다. 왜구의 무장들이 그를 보러 올 때마다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고 부대 지휘의 전권이 그에게 있었다는 점에서 신분이 높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적 영향
아지발도는 조선 초기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조선 왕조 창업의 정당성을 노래한 《용비어천가》 제50장부터 52장에 황산대첩과 함께 등장하며, 이성계의 무공을 찬미하는 소재로 활용되었다. 남원 지역에는 아지발도가 이성계의 화살에 맞아 흘린 피가 스며들었다는 '피바위' 전승이 전해지며, 지리산 산신(노고)이 아지발도의 죽음을 예고했다는 설화도 존재한다. 또한 아지발도라는 명칭은 한국의 '아기장수 설화'와의 연관성이 학계에서 논의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