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신기오로 도도(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ᡩᠣᡩᠣ, Aisin Gioro Dodo, 중국어: 愛新覺羅 多鐸, 병음: Àixīn Juéluó Duōduó, 한자음: 애신각라 다탁, 1614년 4월 2일 ~ 1649년 4월 29일)는 청나라 초기의 만주족 왕자이자 군사 지휘관이었다. 청나라의 건국자 누르하치(천명제)의 15번째 아들이며, 섭정왕 도르곤의 친동생이자 아지거의 친동생이다. 생모는 누르하치의 적복진인 아바하이(阿巴亥) 부인으로, 도도와 아지거, 도르곤 세 형제가 모두 이 부인의 소생이다. 만주 정람기(正藍旗) 소속이었다.
생애와 군사 활동
도도는 1620년에 에전(額真) 작위를 받았고, 13세에 버일러(貝勒)에 봉해져 정백기(正白旗)를 관장하고 예부와 병부의 사무를 맡았다. 1628년에는 청 태종 홍타이지를 따라 차하르(Chahar) 몽골 원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어르커추후얼'(額爾克楚虎爾)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듬해에도 명나라 원정에 참여하여 만리장성을 넘어 베이징 인근까지 진격하였다.
1636년에는 홍타이지를 따라 조선 원정(병자호란)에 참여하여 남한산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이 공으로 화석예친왕(和碩豫親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1638년 군사 작전 중 병영에 창기(娼妓)를 불러들였다는 이유로 버일러로 두 등급 강등당하였다. 이후 1641년 쑹진 전투(松錦之戰)에 참여하여 진저우(錦州) 포위 공격과 쑹산(松山) 공략에서 공을 세워 홍청추(洪承疇)를 포로로 잡는 데 기여했고, 준왕(郡王)으로 한 등급 승격되었다.
1644년 명나라 장수 우싼구이(吳三桂)가 산하이관(山海關)을 개방하여 청군이 명나라 영토로 진입하자, 도도는 리쯔청(李自成)의 농민 반군을 꺾고 베이징을 장악한 뒤 다시 친왕으로 복권되었고 '정국대장군'(定國大將軍)에 임명되었다. 1645년에는 허난에서 산시 지역까지 리쯔청 잔여 세력을 추격하여 격파했고, 이후 남명(南明) 정권 공격에 나서 양저우(揚州)를 함락하고 방어 장수 스커파(史可法)를 처형하였다. 도도가 양저우 함락 후 명령한 학살('양저우 대학살')은 후에 반청 혁명 세력에 의해 만주족에 대한 반감을 고취하는 사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장강을 건너 남명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홍광제(弘光帝)를 포로로 잡았다. 이후 저장까지 점령한 뒤 베이징으로 귀환하여 '화석덕예친왕'(和碩德豫親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말년과 사후
1646년 도도는 '양위대장군'(揚威大將軍)으로 임명되어 카자르 몽골 세력에 대한 원정을 지휘했으나, 주모자 텡기스를 포획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듬해 '보정숙화석덕예친왕'(輔政叔和碩德豫親王)의 칭호를 받았다.
도도는 1649년 천연두로 35세(또는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형 도르곤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르곤은 도도의 병환 소식을 듣고 전장에서 급히 귀환하려 했으나 도도가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통해하였다고 전한다.
1652년 순치제는 도르곤과의 연관성을 이유로 도도를 사후 준왕으로 강등시켰으나, 1671년 강희제 때 시호 '통'(通)을 받아 '다라예통군왕'(多羅豫通郡王)이 되었다. 1778년 건륭제에 의해 사후에 친왕 작위로 복권되고 청나라 조정의 종묘에 배향되었으며, 이후 무크덴(심양) 궁전에 사당이 세워졌다.
가족
도도는 여러 명의 부인과 첩을 두었다. 정복진(嫡福晉)은 코르친 보르지기트 씨 출신 두 명과 나라 씨 출신 한 명이 있었으며, 측복진 및 첩들 사이에서 아들 여덟 명과 딸 여러 명을 두었다. 아들 중 다니(多尼), 도르보(多爾博), 자니(察尼), 둥거(董額) 등이 청나라에서 작위를 받았다. 아들 도르보는 이후 도르곤의 양자가 되어 예친왕 계통을 이어갔다.
역사적 평가
도도는 청나라 초기 가장 유능한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명나라 멸망과 남명 정권의 붕괴, 리쯔청 반군 격멸 등 청나라 통일 과정의 핵심 전역에서 활약하였다. 동시에 개인적 기강 문제로 벌을 받은 기록과 양저우 학살과 관련되어 논란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