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스터리츠 전투(Battle of Austerlitz, 체코어: Bitva u Slavkova)는 1805년 12월 2일, 지금의 체코 동부 모라바 지역의 아우스터리츠(현재의 슬라브코프 우 브르나) 부근에서 벌어진 프랑스 제1제국과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 사이의 전투이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 등 세 황제가 참전하여 '삼제 회전(三帝會戰, Battle of the Three Emperors)'이라고도 불린다.
배경
1803년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 재개된 이후, 영국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프랑스에 대항하는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1805년 영국-러시아 동맹이 체결되었고, 이후 오스트리아도 동맹에 합류하였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영국 침공 계획을 접고 군대를 동쪽으로 이동시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 대응하였다.
1805년 10월, 나폴레옹의 대육군(La Grande Armée)은 울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여 항복시켰고, 이후 빈을 함락하였다. 이에 러시아군과 잔존 오스트리아군은 북쪽으로 퇴각하여 지원군과 합류하려 하였다. 나폴레옹은 동맹군이 재집결하기 전에 전투를 강요할 필요가 있었다.
전투 경과
나폴레옹은 고의로 프랑스군의 우익을 약화시켜 동맹군의 공격을 유인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동맹군은 프랑스군의 우익을 공격하는 작전을 채택하여 주력 병력을 남쪽 측면에 집중 배치하였다. 이로 인해 동맹군의 중앙이 약화된 틈을 타, 나폴레옹은 술트 원수가 지휘하는 제4군단 약 16,000명을 프라첸 고지대 방향으로 투입하여 동맹군의 중앙을 돌파하였다.
전투는 오전 8시경 텔니츠 마을에 대한 동맹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동맹군은 프랑스군 우익을 압박했으나, 다부 원수의 제3군단이 48시간 동안 약 110km를 진군하여 도착하면서 저지되었다. 한편 프랑스군은 약화된 동맹군의 중앙을 공격하여 프라첸 고지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프랑스군은 동맹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전열을 붕괴시켰다.
전투 종반에는 퇴각하던 러시아군이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려다 프랑스 포병의 포격으로 얼음이 깨져 다수가 익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만 이때의 정확한 사상자 수는 사료에 따라 200명에서 2,000명까지 차이가 있으며, 정확한 수치는 확정하기 어렵다.
결과와 영향
동맹군은 약 73,000명의 병력 중 약 27,000명의 사상자를 입었고, 프랑스군은 약 67,000명 중 약 9,000명의 사상자를 입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맹군은 또한 180문의 대포와 50개의 깃발을 잃었다. 다만 병력 규모와 사상자 수치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 전투의 승리로 프랑스는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사실상 와해시켰다. 1805년 12월 26일 체결된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이탈하고, 영토 일부를 양도하며 전쟁 배상금 4,000만 프랑을 지불하였다. 이후 나폴레옹은 독일 국가들의 연합체인 라인 동맹을 창설하였고, 1806년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 승리가 유럽에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라인 동맹 창설 등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에 우려를 느낀 프로이센은 1806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역사적 평가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의 가장 대표적인 전술적 승리로 평가되며, 역사가들 사이에서 칸나에 전투, 블렌하임 전투 등과 함께 군사사에서 위대한 전술적 승리로 꼽힌다. 나폴레옹은 의도적으로 우익을 약화시켜 적을 유인하고, 약화된 적의 중앙을 정밀하게 공략하는 전술을 구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투는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서도 주요 사건으로 다루어졌으며,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제1제정의 대표적인 승리로 숭배되었다. 다만 최근에는 나폴레옹의 식민지 정책 등에 대한 논쟁과 함께 전투 기념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