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あしかが よしまさ, 1436년~1490년)는 일본 무로마치 시대 중기부터 센고쿠 시대 초기에 걸쳐 재임한 무로마치 막부 제8대 쇼군이다. 재위 기간은 1449년부터 1473년까지이다.
생애 및 가계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1436년(에이쿄 8년) 1월 2일, 제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히노 시게코(日野重子)이다. 1441년 가키쓰의 난(嘉吉の乱)으로 부친 요시노리가 아카마쓰 미쓰스케에게 살해된 후, 쇼군직은 친형인 제7대 쇼군 요시카쓰(義勝)가 이었으나 요시카쓰가 1443년에 요절하였기 때문에, 요시마사는 8세의 나이로 간레이(管領) 하타케야마 모치쿠니의 후견을 받아 쇼군직에 선출되었고, 1449년에 관례를 올리고 정식으로 제8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정실은 히노 도미코(日野富子)이며,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요시히사(義尚)를 두었다. 또한 이복동생인 요시미(義視)와 그 아들 요시타네(義稙)를 양자로 삼았다.
정치적 평가
요시마사는 재임 초기에는 조부 아시카가 요시미쓰와 부친 요시노리의 정책을 부활시키려 노력하였고, 측근 집단을 기반으로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의 세력에 대항하여 쇼군의 친정권 강화를 꾀하였다. 이 시기의 무로마치 막부를 '요시마사 전제(義政専制)' 체제로 보는 학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유력 슈고 다이묘와 정실 히노 도미코의 친정 세력이 정치에 개입하면서 쇼군으로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는 것이 어려워졌고, 점차 정무에 관심을 잃게 되었다.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어 1467년에는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발발하였으며, 이 전란은 1477년까지 11년간 지속되어 일본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이후 센고쿠 시대(戦国時代)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473년 요시마사는 쇼군직을 아들 요시히사에게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역사적으로 요시마사는 정무를 소홀히 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여 무능한 쇼군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의 아내 히노 도미코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실권을 행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문화적 업적
정치적 실패와 대조적으로, 요시마사는 문화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건축, 예술, 정원 조성 등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교토 히가시야마(東山)에 히가시야마 산장(東山山荘)을 조영하였다. 이 산장은 후에 지쇼지(慈照寺)가 되었으며, 그 안에 세워진 은각(銀閣)은 일본 건축사의 대표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요시마사가 후원한 히가시야마 문화(東山文化)는 조부 요시미쓰 시대의 화려한 기타야마 문화(北山文化, 금각으로 대표됨)와 대비되며, 일본 전통 미의식인 와비 사비(侘び寂び)를 중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는 정원사 젠아미(善阿弥), 화가 가노 마사노부(狩野正信), 노가쿠(能楽)의 명인 온아미(音阿弥) 등 당대의 예술가들을 후원하였고, 다도(茶道), 화도(華道), 노(能) 등 일본 전통 예술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한 문화 후원자로 평가된다.
대외 관계
요시마사는 부친 요시노리 사후 중단되었던 명나라와의 감합무역(勘合貿易)을 1451년에 부활시켰다. 이 감합무역은 16세기 중엽까지 이어져 경제 교류와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사망
1489년 아들 요시히사가 진중에서 사망하자 요시마사는 정무 복귀를 결의하였으나, 중풍으로 쓰러져 사실상 정무에 복귀하지 못하였다. 동생 요시미와 화해하고 그 아들 요시키(義材, 후의 요시타네)를 양자로 삼아 제10대 쇼군으로 지명한 후, 1490년 1월 27일(엔토쿠 2년 음력 1월 7일)에 사망하였다. 법명은 지쇼인키잔도케이(慈照院喜山道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