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아리오스는 리비아 또는 이집트 출신으로 추정되며,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노스 밑에서 신학을 공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당시 중요한 신학적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바우칼리스(Baucalis) 교구의 장로(presbyter)가 되었다. 그는 지적이고 금욕적인 생활 방식으로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으며, 그의 설교는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아리우스주의
아리오스의 주요 교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성자는 창조된 존재: 하느님 아버지만이 태어나지 않고(unbegotten) 영원하며 무한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이다. 반면 성자(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created)' 존재이며,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There was a time when the Son was not)."는 명제를 내세웠다.
- 성부와 성자의 위계: 성자는 가장 완전하고 신적인 피조물이지만, 본질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동등하지 않고 하위에 있다.
- 성자의 역할: 성자는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가 사용한 도구이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었을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교리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니케아 공의회와 논쟁
아리오스의 교리는 알렉산드리아 교구 내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오스를 파문했다. 이 논쟁은 제국 전체로 확산되었고, 기독교 세계의 분열을 우려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25년 니케아에서 전 세계 주교들을 소집하여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에서 아리오스의 주장은 철저히 검토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주교를 비롯한 주교들은 아리우스의 교리가 이단임을 선언했다. 공의회는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성자 예수는 '성부와 본질이 같다(homoousios)'는 교리를 확립함으로써, 아리오스주의가 주장하는 성자의 피조성을 부인했다. 아리오스와 그를 지지하는 일부 주교들은 추방되었다.
이후 생애와 영향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도 아리우스주의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상당 기간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리오스는 여러 차례 복권을 시도했으며, 황실 내부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한때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갈 기회도 얻었다. 그러나 그는 33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급작스럽게 사망했는데, 그 죽음의 원인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아리오스주의는 이후 특히 게르만족(고트족, 반달족 등) 사이에서 퍼져나갔으며, 이들 민족이 로마 제국을 침략했을 때 정통 기독교와 충돌하기도 했다. 아리우스주의와의 논쟁은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이 명확하게 정립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같이 보기
- 아리우스주의
- 제1차 니케아 공의회
- 아타나시우스
- 니케아 신경
- 기독론
- 삼위일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