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기누사이 해전(Battle of Arginusae)은 기원전 406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르기누사이 제도(현재의 튀르키예 디킬리 인근, 가리프 아다스ı) 인근 해역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 전투는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거둔 마지막 대규모 승리로 기록된다.
배경
기원전 413년 시칠리아 원정의 참패 이후 아테네는 인적·재정적 손실로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기원전 406년, 스파르타 해군 사령관 칼리크라티다스(Callicratidas)는 120~170척의 함대를 이끌고 레스보스 섬을 공격했고, 아테네 제독 코논(Conon)의 함대를 미틸레네(Mytilene) 항구에 봉쇄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아테네는 구원 함대를 편성하기 위해 신전의 금박과 신상까지 녹여 재정을 조달하고, 노예와 외국인까지 동원하여 1개월 만에 110척의 함대를 긴급 건조하였다. 사모스 섬의 지원 함대와 합류한 아테네 함대는 총 150~155척 규모로 성장했으나, 승무원 대부분이 미숙련자였기에 질적으로는 스파르타에 열세였다. 함대는 8명의 장군(아리스토크라테스, 아리스토게네스, 디오메돈, 에라시니데스, 리시아스, 페리클레스, 프로토마코스, 트라쉴로스)이 공동으로 지휘하였으며, 단일 최고사령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투 경과
칼리크라티다스는 120척의 함대를 이끌고 아르기누사이 제도로 접근했다. 아테네 함대는 질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이중 전열(double line)이라는 변칙적인 대형을 채택했다. 이는 적 함선이 두 함선 사이로 돌파하여 측면을 충각하는 디에크플루스(diekplous) 전술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테네 함대는 좌익을 넓게 펼쳐 스파르타 함대를 반포위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칼리크라티다스는 퇴각 권유를 거부하고 전투를 지속하다 전사했으며, 그의 전사 이후 스파르타 우익이 붕괴하면서 스파르타 함대는 궤멸되었다. 스파르타는 약 70척의 함선을 상실했고, 아테네는 25척을 상실했다.
전투 이후: 장군들의 재판
전투 직후 아테네 장군들은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첫째는 미틸레네에 봉쇄된 코논 함대를 구원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침몰한 아테네 함선의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것이었다. 장군들은 트리에라르코스(삼단노선 선장)인 테라메네스(Theramenes)와 트라시불로스(Thrasybulus)에게 구조 임무를 맡기고, 자신들은 주력 함대를 이끌고 미틸레네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인해 구조 임무는 실패했고, 약 1,000여 명의 아테네 병사들이 익사했다.
아테네 민회는 이 소식에 분노했고, 장군들은 해임되어 아테네로 소환되었다. 두 명의 장군(아리스토게네스, 프로토마코스)은 망명했고, 나머지 6명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당시 프리타네이스(의장단)로서 불법적인 집단 표결에 반대한 유일한 인물이었으나, 결국 6명의 장군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결과와 영향
아테네는 이 승리로 스파르타에 큰 타격을 입혔고, 스파르타는 평화 협정을 제안했으나 아테네 민회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스파르타는 리산드로스(Lysander)를 재기용하여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함대를 재건했고, 기원전 405년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를 전멸시켰다. 이로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주요 사료
이 전투에 대한 주요 사료로는 크세노폰의 《헬레니카》(Hellenica),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역사 총서》(Bibliotheca historica),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