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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쿠시 히로카도

쓰쿠시 히로카도(일본어: 筑紫 広門, つくし ひろかど)는 일본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활동한 무장이자 다이묘이다. 지쿠고(筑後) 고즈마군(神埼郡) 출신의 고쿠진(国人) 영주 가문인 쓰쿠시 씨(筑紫氏)의 일원으로, 히젠(肥前) 가쓰노오성(勝尾城)을 거점으로 하여 지쿠젠(筑前) 남서부 일대까지 세력을 장악하였다.

생애

쓰쿠시 히로카도의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와 한국어 위키백과는 1556년 출생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영어 위키백과는 1548년 출생으로 기록하고 있어 정확한 출생 연도는 문헌마다 상이하다. 사망 연도 역시 일본어·한국어 위키백과는 1623년 5월 22일로, 영어 위키백과는 1615년 5월 22일로 기록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

그는 쓰쿠시 이에카도(筑紫惟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니쿠이치마루(二九市丸), 이후 지로(次郎), 시게쓰네(鎮恒)로 개명하였다가 히로카도(広門)로 개명하였다. 말년에는 무안(夢庵)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관위는 종5위하(従五位下) 고즈케노스케(上野介)에 이르렀으며, "히젠의 사나운 말(肥前の悍馬)"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졌다.

1567년에는 오토모(大友) 가문의 장수 다카하시 쇼운(高橋紹運)에게 패배하였고, 1572년에는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규슈를 정벌할 때 히데요시 측에 가담하여 지쿠젠의 영지를 회복하였다.

가족 관계

히로카도의 아내는 다카하시 쇼운의 아내와 자매 관계에 있었으며, 딸 중 한 명은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의 측실이 되었다. 또한 딸 중 한 명은 다치바나 나오쓰구(立花直次)의 정실이 되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다치바나 다다무네(立花忠茂)는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의 양자가 되어 지쿠고 야나가와번(柳河藩)의 번주가 되었다.

후손

히로카도 사후, 후계자인 주수정(主水正) 히로카도는 오사카 전투(大坂の陣)에서의 공로로 1627년(간에이 4년)에 3,000석의 영지를 받았으며, 그 자손은 3,000석의 하타모토(旗本) 요리아이세키(寄合席)로서 가문을 이어갔다.

일화

섬국(島津) 군에 패하여 유폐되었을 당시, "忍ぶれば いつか世に出ん折やある 奥まで照らせ 山のはの月"라는 와카(和歌)를 읊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들은 사람들은 "옛날에는 히로카도(広門, 넓은 문), 지금은 세마문(狭門, 좁은 문)"이라며 조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이후 옛 영지를 되찾았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관련 기록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1597년(게이초 2년) 10월 말경 히로카도는 고바야카와 히데카네(小早川秀包)와 함께 조선의 성주(星州) 곡성(谷城) 지역을 수비하였다. 명나라 장수 이여매(李如梅)가 군대를 이끌고 포위하자, 히로카도와 히데카네의 병력은 천 명에도 미치지 못하고 병량도 부족하여 결사 항전을 각오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파견한 원군과 합류하여 명군을 격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평가

쓰쿠시 히로카도는 규슈 지역의 여러 강대 세력(오토모, 류조지, 시마즈, 도요토미) 사이에서 상황에 따라 동맹을 바꾸며 가문의 생존을 도모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생애는 센고쿠 시대 규슈 지방의 복잡한 세력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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