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가루 유키쓰구(일본어: 津軽順承, 1800년 2월 6일 ~ 1865년 3월 2일)는 에도 시대 말기의 다이묘(번주)로, 구로이시번(黒石藩)의 2대 번주이자 히로사키번(弘前藩)의 11대 번주이다. 아명은 신노스케(新之助)이다.
생애
유키쓰구는 1800년(간세이 12년) 음력 1월 13일, 미카와 요시다번(三河吉田藩)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松平信明)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학자 사토 잇사이(佐藤一斎)에게 수학하였다.
1821년(분세이 4년), 구로이시번의 초대 번주 쓰가루 지카타리(津軽親足)의 양자가 되어 쓰가루 유키노리(津軽順徳)라는 이름을 얻었다. 1825년 지카타리가 은거하면서 그 뒤를 이어 구로이시번의 2대 번주가 되었다.
1839년(덴포 10년), 본가인 히로사키번의 번주 쓰가루 노부유키(津軽信順)가 막부의 명령으로 강제 은거당하면서, 그 양자로 히로사키번을 계승하고 유키쓰구로 개명하였다. 구로이시번은 셋째 딸 아이히메(愛姫)의 남편인 쓰가루 쓰구야스(津軽承保)를 양자로 삼아 가독을 잇게 하였다.
정책과 업적
히로사키번을 계승한 당시, 번은 덴포 대기근(天保の大飢饉)과 전임 번주 노부유키의 난행으로 인해 재정이 크게 악화되어 있었다. 유키쓰구는 이를 회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 검약령과 경비 절감 정책 시행
- 농지 개간과 재생 사업
- 저축 제도를 통한 흉작 대책 마련
- 서양식 군비 증강 및 대포 주조
- 해안 경비 강화
- 의학관과 난학당(蘭学堂) 설치 등 학문 장려
이러한 개혁을 통해 번의 재건에 힘썼으며, 히로사키번에서는 그를 쓰가루 노부아키라와 함께 명군(名君)으로 칭송하였다.
말년
1859년(안세이 6년) 음력 2월 7일, 사위 양자인 쓰가루 쓰구아키라(津軽承昭)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면서 조라쿠안(長楽庵)이라고 칭하였다. 이후 하이쿠(俳句) 연구에 몰두하였다.
1865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참고 사항
유키쓰구의 일본어 한자 표기는 '津軽順承'이며, '쓰가루 유키쓰구'는 그 음독 표기이다. 그가 개혁의 모범으로 삼았던 쓰가루 노부아키라는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와 동일 인물로, 유키쓰구의 친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