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규(沈象奎, 1766년~1838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초명은 상여(象輿)였다. 자는 가권(可權)·치교(穉敎), 호는 두실(斗室)·이하(彛下)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정조로부터 '상규'라는 이름과 '치교'라는 자를 하사받았다.
1789년(정조 13년)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교서관정자, 규장각대교 등을 거쳤으며, 정조의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어 총애를 받았다. 1796년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웅천현감에 외보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정조가 그의 재주가 지나치게 드러나는 것을 우려하여 후일 크게 쓰기 위한 배려였다고 전해진다.
정조 사후 1801년 신유박해 시기에 채지영 등의 무고로 홍원과 남원에 유배되었다가, 1804년(순조 4년) 안동 김씨 세도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조실록』 편수당상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조·호조·형조 참판, 전라도 관찰사, 예조판서, 홍문관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811년(순조 11년) 병조판서로서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21년 대제학이 되었고, 예조·이조·공조 판서를 거치면서 궁방전(宮房田)의 면세지 5,000결을 감축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1825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1833년 좌의정, 1834년(순조 34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순조가 승하하고 헌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관장하였다. 1835년(헌종 1년) 영의정에서 사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이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노론 시파(時派)의 거두였으며, 안동 김씨의 김조순, 남공철, 이만수, 서영보 등과 함께 '천생오태사(天生五太史)'로 불리며 순조 시대 정계의 핵심으로 활동하였다. 북학파(北學派)로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대문장가이자 대장서가(大藏書家)로도 알려져 있다. 가성각(嘉聲閣)을 지어 약 4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였으며, 경복궁 동편 송현동에 위치한 대저택은 당대 문사들이 교류하던 최고의 문화공간이었다.
저서로는 『두실존고(斗室存稿)』 16권이 전하며, 편찬한 책으로는 『건릉지장속편(健陵誌狀續編)』, 『만기요람(萬機要覽)』,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공편), 『홍재전서(弘齋全書)』(주관 편찬) 등이 있다. 글씨로는 「경춘전기(京春殿記)」가 남아 있다. 광주유수 겸 수어사 재임 시절 남한산성에 좌승당(坐勝堂), 이위정(以威亭), 옥천정(玉泉亭) 등을 조성하였으며, 선정을 기려 세워진 거사비(去思碑)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