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평(申漢枰, 1726년~1809년?)은 조선 후기의 도화서(圖畵署) 화원이자 무관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자익(子翼)으로 추정되고, 호는 일재(逸齋)이다. 조선 전기 문신 신말주(申末舟)의 10대손이며, 화원 신일흥(申日興)의 조카이자, 조선 후기 대표 풍속화가인 혜원 신윤복(申潤福)의 아버지이다. 신한평의 종조부 신세담(申世潭)과 당숙 신일흥, 아들 신윤복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에 걸쳐 화원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신한평의 생년은 1726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부족하며, 1735년이라는 설도 있으나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숙부 신덕흡(申德洽)의 생몰년과 교유 인물들의 나이, 1809년까지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으로 활동한 점을 고려할 때 1726년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망 연도 역시 1809년 이후로 추정될 뿐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1784년(정조 8)부터 1809년(순조 9)까지 26년간 규장각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畫員)으로 봉직하였으며, 4차례 사과(司果)·사정(司正)에 부록되었다. 특히 어진(御眞) 제작에 세 차례 참여한 어용화사(御用畫師)로서, 1773년(영조 49) 영조의 곤복본(袞服本), 1781년(정조 5) 정조의 익선관본(翼善冠本), 1791년(정조 15) 정조의 원유관본(遠遊冠本) 제작에 동참하였다. 이는 당대 최고의 화원들만 선발되던 자리였다.
1788년(정조 12)에는 정조의 명으로 이종현(李宗賢)과 함께 책가도(冊架圖)를 그려 제출하였으나, 형편없다는 평가를 받고 차비대령화원에서 파면당하고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789년 사도세자의 영우원(永祐園) 천봉도감청(遷奉都監廳)에 소속되어 다시 활동하였고, 이후에도 화원직을 유지하였다.
신한평은 산수·인물·초상·화훼·영모·속화·누각·문방·매죽 등 여러 장르에 두루 능했다. 특히 초상화에 뛰어나 세 차례 어진 제작에 참여할 수 있었다. 대표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원교이광사초상도〉(圓嶠李匡師肖像圖), 〈화조도〉(花鳥圖), 〈쌍순도〉(雙鶉圖), 〈우경산수도〉(雨景山水圖), 〈자모육아도〉(慈母育兒圖) 등이 전해진다. 현존하는 작품은 10점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신한평은 김홍도(金弘道), 김응환(金應煥), 이인문(李寅文), 한종일(韓宗一), 이종현 등 당대 저명한 화원들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아들 신윤복의 화풍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