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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통치 반대운동

신탁통치 반대운동(信託統治反對運動)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미국·영국·소련)에서 결정된 한반도 신탁통치 방안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정치적·사회적 운동이다. '반탁 운동(反託運動)'이라고도 불린다.

배경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국은 카이로·얄타·포츠담 회담 등을 거치면서도 한반도의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 최종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 3국 외상회의에서 한국에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이 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공식적인 전후 처리 방침으로 삼고 있었으며, 소련이 수정안을 제출하면서 최종 결정이 이루어졌다.

전개 과정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이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 내용을 보도하였다. 초기 보도는 사실과 다른 오보에 가까운 내용이었으며,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이에 즉각적으로 광범위한 반대운동이 촉발되었다. 1945년 12월 28일 김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심이 되어 각계 대표자 회합이 열렸고, 이튿날인 12월 29일에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으로 간주하고 강경한 태도로 운동을 주도하였다. 1945년 12월 30일에는 신익희 내무부장 명의로 국자(國字) 1호와 2호 포고문을 발표하여 미군정 소속 한인 관리들이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를 것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이에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John Hodge) 중장은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고 경고하였다.

좌우 대립의 심화

초기에는 좌익 세력도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1946년 1월 초 타스 통신 등을 통해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정확한 내용이 전해지면서 좌익 세력(조선공산당 등)은 모스크바 결정 내용에 대한 총체적 지지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이로 인해 찬탁(찬성)과 반탁(반대) 진영으로 나뉘어 좌우 대립 구도가 확고하게 형성되었다.

1945년 12월 30일에는 신탁통치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표명했던 한국민주당의 송진우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반탁운동은 1946년 1월 초까지 고조되었으며, 이후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재개가 가시화되면서 재차 전개되었으나 강도와 규모는 1차에 비해 약화되었다.

결과 및 평가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해방정국(1945~1948년)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이 운동을 계기로 좌익과 우익 세력 간의 대결 구도가 조직적으로 분립되었고, 이후 한반도 정치 구도를 결정짓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우익 세력은 비상국민회의를 거쳐 민주의원으로 연결되는 조직적 행보를 보였고, 좌익 세력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 결국 한국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신탁통치 문제 자체가 소멸되었고 운동도 자연스럽게 종료되었다. 이 운동은 미·소 협력보다 대립을 강화하는 성격이 짙었기에 한반도 분단을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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