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전(申翊全, 1605~1660)은 조선 후기 인조~현종 시기에 활동한 문신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여만(汝萬), 호는 동강(東江) 또는 화천(花川)이다. 영의정 신흠(申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제신의 딸 전의 이씨이다. 형은 신익성(申翊聖)이며,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26년(인조 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파방(罷榜)되었다가, 1636년(인조 14) 별시 문과에 다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임명된 후 예문관 검열, 봉교 등을 거쳤다. 1638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수찬 등을 지냈다. 1639년에는 사은사 최명길의 서장관으로 심양(瀋陽)에 파견되어 소현세자의 귀환을 청나라에 요청하였으나, 이 일로 왕의 뜻을 어겼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하옥되어 유배되었다.
1642년(인조 20)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한 '척화 5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형 신익성, 허계, 이명한, 이경여 등과 함께 심양으로 압송되어 구금되었고, 소현세자의 구명으로 풀려났다.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사망한 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이후 승정원 동부승지, 우부승지 등을 거쳤다.
효종 즉위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자되었고, 호조·예조·병조·형조의 참판, 한성부 좌윤·우윤, 개성부 유수,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51년(효종 2) 조귀인과 김자점의 옥사 당시 그의 딸이 숭선군(인조의 서자)의 아내였던 관계로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으나, 화를 면하고 밀양부사로 나갔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국장도감 제조를 맡았고, 1660년(현종 1)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증직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그에 대해 "사람됨이 순박하고 겸허하였으며, 권요의 직책을 사양하고 피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역학(易學)에 정통하였고, 문장과 서예(書法)에 뛰어나 한 시대의 금석문을 많이 썼다. 저서로는 《동강유집(東江遺集)》 19권 3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