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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

신돈(辛旽, 1323년~1371년)은 고려 말기의 승려이자 공민왕 시기의 정치가이다. 법명은 편조(遍照)이며, 자는 요공(耀空), 호는 청한거사(淸閑居士)이다. 경상도 영산현(현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출생이며, 본관은 영산 신씨이다.

생애 초기

신돈은 대족(大族)의 서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절의 비녀(婢女) 출신이었다. 어려서 승려가 되어 각지를 방랑하였으며, 매골승(埋骨僧)으로 생활하였다. 신분에 따라 신도를 차별하지 않아 백성들 사이에서 신승(神僧) 또는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칭송받았다. 이후 개경의 현화사 주지가 되었다.

공민왕과의 만남과 집권

공민왕은 신돈의 소문을 듣고 직접 영산현까지 내려가 만나 대담하였으며, 그의 달변에 매료되어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1354년(공민왕 3년) 왕사(王師)로 임명하려 하였으나, 노비 출신이라는 신분 문제로 권문세족의 반발에 부딪혀 입궐하지 못하였다. 이후 1364년 두타승(頭陀僧)이 되어 궁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국정 자문역을 맡았다.

1365년(공민왕 14년)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한 후,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신돈에게 정권을 사실상 위임하였다. 신돈은 환속하여 진평후(眞平侯)에 봉해지고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 등 고위 관직을 겸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개혁 정책

신돈의 주요 개혁 정책은 다음과 같다.

  •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설치(1366년):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강탈한 토지를 원주인에게 되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민으로 환원시켰다. 이는 고려 광종의 노비안검법에 비견되는 조치였다.
  • 성균관 중건(1367년): 공자를 '천하 만세의 스승'으로 격상시키고 성균관을 중건하여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의 성장을 지원하였다.
  • 순자격식(循資格式) 시행: 관리 승진 시 근무 연한을 고려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권세가 자제들의 특혜 승진을 막고자 하였다.

몰락과 최후

신돈의 급진적인 개혁은 권문세족의 맹렬한 반발을 불렀다. 또한 주색에 빠지고 많은 첩을 거느리는 등 타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공민왕은 신돈의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커지자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1369년 이인(李韌)이 신돈이 반역을 꾀한다는 거짓 투서를 올렸고, 이에 공민왕은 신돈을 수원부에 유배하였다. 1371년(공민왕 20년) 역모 혐의로 참수되었다. 신돈의 가족과 일파도 대부분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역사적 평가와 논란

조선 시대의 사료들에서 신돈은 '나라를 망친 요승(妖僧)'으로 묘사되었다. 조선 개국 세력은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후손이라는 설을 유포하여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조선 건국을 합리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현대 학계에서는 이는 신진사대부 세력이 고려 왕조를 장악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으로 추정한다.

1970년대 이후 신돈에 대한 재평가 논의가 대두되었다. 신분 차별과 남녀 차별이 없는 사회를 지향한 개혁가로서, 승려였음에도 유교와 도교 사상을 인정하고 수용한 점, 토지와 노비 개혁을 통해 민생 안정을 도모한 점 등이 재조명되고 있다. 다만 그의 개혁이 급진적이었고, 집권 후반기의 타락한 행적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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