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是儀)는 중국 후한 말기에서 삼국시대에 걸쳐 동오(동오, 東吳)에서 활약한 문관이다. 자는 자우(子羽)이며, 북해군 영릉현(현 산둥성 지역) 출신이다. 본래 성은 씨(氏)였으나, 당시 북해상이었던 공융(孔融)이 "씨(氏)자는 민(民)자에서 위쪽이 없는 것이니 성을 시(是)로 바꾸라"고 농담한 것을 따라 성을 시(是)로 바꾸었다.
생몰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0년대부터 240년대까지 활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81세에 사망하였다.
생애
처음에는 현의 관리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유요(劉繇)에게 의탁하여 강동으로 피난하였고, 유요가 손책(孫策)에게 패하자 회계(會稽)로 이주하였다. 손권(孫權)이 손책의 뒤를 이은 후, 시의는 문필 능력을 인정받아 초빙되었고 기밀 사항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다.
219년 여몽(呂蒙)이 관우(關羽) 토벌 계획을 세울 때 시의는 여몽의 계획에 적극 찬성하였고, 관우 토벌에 종군하여 충의교위(忠義校尉)로 승진하였다. 손권이 병권을 주려 하였으나 시의는 자신에게 장수의 재능이 없다며 사양하였다.
228년에는 유소(劉邵)와 함께 조휴(曹休)를 유인하는 작전에 참여하여 이를 크게 격파하였고,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상서(尙書)의 일을 담당하며 각 관원을 총괄하고 송사(訟事) 처리를 겸하였으며, 여러 공자(公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손권이 수도를 건업(建業)으로 옮긴 후 태자 손등(孫登)을 무창(武昌)에 남겨 지키게 할 때 시의는 태자 보좌 임무를 맡았으며, 태자는 시의를 존경하여 중요한 일이 있으면 먼저 그에게 자문한 후 시행하였다. 이후 시의는 시중(侍中), 중집법(中執法)에 임명되었다.
234년 제갈량(諸葛亮)이 사망하자 손권은 시의를 촉(蜀)에 사신으로 보내 우호 관계를 강화하였고, 이 공로로 상서복야(尚書僕射)에 임명되었다.
손화(孫和)와 손패(孫霸)의 두 궁(二宮)이 세워졌을 때 시의는 손패의 부상(傅相)을 겸임하였으나, 두 궁의 지위 차이가 모호한 것을 우려하여 상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세 차례나 올렸다.
성품과 평가
시의는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로 유명하였다. 사사로운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고 남의 은혜를 받지 않았으며, 집은 자신을 수용할 만한 크기로만 지었다. 손권이 시의의 집을 방문하여 거친 음식을 직접 맛보고 감탄하여 봉록과 토지를 더해 주었으나, 시의는 누차 사양하였다.
여일(呂壹)이 강하태수 조가(刁嘉)를 무고한 사건에서,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두 여일을 두려워하여 조가가 비방하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으나 시의만이 듣지 못했다고 사실대로 답변하여 조가가 사면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시의는 수십 년간 국가를 섬기면서 한 번도 허물이 없었으며, 여일이 여러 장군과 대신들을 탄핵할 때 유독 시의만은 고발되지 않았다. 손권은 "만일 사람들이 모두 시의와 같다면 어찌 법령이 필요하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진수(陳壽)는 《삼국지》에서 시의를 두고 "청렴하고 삼가며 곧고 소박했다(清恪貞素)"고 평하였다.
시의는 임종 때 옻칠하지 않은 관(棺)과 평상복으로 염(殮)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며,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