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시게히데(일본어: 島津重豪, 1745년 11월 29일 ~ 1833년 3월 6일)는 일본 에도 시대 중기부터 후기까지 활동한 다이묘(大名)로, 시마즈 씨(島津氏) 제25대 당주이자 사쓰마번(薩摩藩) 제8대 번주이다.
생애
1745년(연향 2년), 분가인 가지키시마즈가(加治木島津家) 당주 시마즈 히사카타(후의 시마즈 시게토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젠지로(善次郎)이며, 출산 당일 어머니 도미(都美)가 19세의 나이로 사망하는 불운을 겪었다. 1755년(호레키 5년), 아버지 시게토시의 사망으로 불과 11세의 나이에 사쓰마번 번주 자리에 올랐다.
정치 및 업적
시게히데는 서양 학문(난학, 蘭學)에 깊은 관심을 가져 '난펙(蘭癖, 난학에 빠진 버릇)'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는 에도 막부의 로주(老中)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의 개혁 정책에 호응하여 사쓰마번에 서양 학문과 해외 무역을 적극 도입하고자 하였다. 또한 로마자를 쓸 수 있었고 네덜란드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80세가 넘은 나이에 독일 출신 의사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와 회견하여 서양의 상황을 듣기도 하였으며, 지볼트는 시게히데에 대해 "80여 세로 들었으나 60세 전후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개명적이고 총명한 군주"라고 평가하였다.
가족 관계
시게히데의 딸(고다이인, 広大院)은 에도 막부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斉)의 정실(미다이도코로)이 되었다. 이로 인해 시게히데는 쇼군의 장인이 되어 '다카나와게바쇼군(高輪下馬将軍)'이라 불릴 정도로 막부 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재정 문제
시게히데는 서양 문물 도입, 각종 사업, 그리고 호화로운 생활로 인해 막대한 재정 지출을 초래하였다. 결국 사쓰마번은 다이묘가시(大名貸)에서 자금 조달이 거절될 정도가 되었고, 민간 고리대금업자에게까지 빚을 내어 총 500만 냥(현대 가치 약 5000억 엔)에 달하는 천문학적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대 사료에서는 "사쓰마번이 천문학적 빚을 지게 된 원인을 만든 영주"로 비판받기도 한다.
성격 및 일화
시게히데는 매우 건강한 인물로, 80세가 넘어서도 가고시마와 에도, 나가사키를 동분서주하며 활동하였다. 당시 시의(侍醫)는 "80세이지만 여전히 건강하며, 글을 쓰거나 읽을 때도 안경이 필요하지 않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대단한 주당(酒豪)으로 알려져 있어, 각 가문에서는 시게히데가 방문하면 술 상대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꺼렸다고 한다. 69세의 나이에 측실이 된 마키노 지사(牧野千佐)는 그를 유일하게 술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인물로 전해진다.
말년
1833년(덴포 4년) 1월 15일,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이케노우에정의 시마즈가 묘지(후쿠쇼지 절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