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랑(承務郞)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에서 문관 품계(品階)로 사용된 관직명이다. 한자로는 '받들 승(承)', '힘쓸 무(務)', '사나이 랑(郞)'을 쓴다.
고려시대의 승무랑은 문산계(文散階)의 하나로, 종팔품 하(從八品下)에 해당하는 문관 품계였다. 문종(文宗) 때 관제를 정비하면서 제정되었으며, 이후 충렬왕(忠烈王) 때 폐지되었다. 고려의 문산계는 9품 29계로 구성되었으며, 승무랑은 그중 하위 등급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의 승무랑은 잡직계(雜職系) 문관(文官)에게 주어진 품계로, 종칠품(從七品)에 해당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된 조선의 품계 체계에서, 같은 종칠품으로는 문관 정직(正職)에게는 계공랑(啓功郞), 무관에게는 분순부위(奮順副尉), 무관 잡직에게는 선용부위(宣勇副尉) 등이 각각 주어졌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혁될 때 종칠품은 정칠품과 함께 7품으로 단일화되었고, 품계명도 무공랑(務功郎)으로 개칭되었다.
당나라에서도 승무랑(承務郞)이 문산계의 하나로 존재하였다. 신라 말기의 학자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서 고변(高騈)의 막료로 활동할 당시, 황소의 난을 토벌하는 격문(토황소격문)을 지은 공로로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임명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사례가 『삼국사기』 및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등의 금석문에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에서 승무랑은 6부(六部) 소속의 낭관(郎官)으로, 후대에는 원외랑(員外郞)으로 불렸다.
이와 같이 승무랑은 고려·조선·당나라에 걸쳐 문관의 품계 명칭으로 사용된 역사적 용어이며, 시대와 국가에 따라 그 품등과 성격에 차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