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렌스크 전쟁(1632년~1634년)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러시아 차르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30년 전쟁의 일부로 간주되기도 하며, 러시아가 1618년 데울리노 휴전(Truce of Deulino)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할양한 스몰렌스크 및 체르니히우-시베르스크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발발하였다.
배경
1618년 데울리노 휴전으로 러시아는 스몰렌스크, 로슬라블, 도로고부시, 스타로두프, 노브고로드-시베르스키, 체르니히우 등 서부 영토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상실하였다. 1630년대 초, 러시아는 동란 시대(Time of Troubles)의 혼란에서 점차 회복하여 경제와 군사력을 재건하였다. 1632년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Sigismund III Vasa)가 사망하고 새로운 국왕 선출 과정에서 연방이 일시적으로 약화되자, 러시아는 이를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 기회로 판단하였다.
러시아 차르 미하일 표도로비치와 그의 아버지이자 실권자였던 필라레트 총주교(Patriarch Filaret)는 전쟁을 추진하였다. 러시아는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 II Adolph)의 군사 기술 지원을 받아 군대를 현대화하였고, 서유럽식 '신형 연대'(полки нового строя)를 창설하였다. 스웨덴은 러시아에 경야포 주조 기술을 전수하였고, 툴라와 카시라에 군수 공장이 설립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원도 기대되었으나 실질적인 군사 동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전쟁의 경과
1632년 6월, 러시아는 데울리노 휴전 만료를 기다리지 않고 전쟁을 선포하였다. 1632년 10월, 미하일 보리소비치 셰인(Mikhail Borisovich Shein) 보야르가 지휘하는 약 24,000명의 러시아 주력군이 스몰렌스크로 진격하였다. 러시아군은 도로고부시, 벨라야, 로슬라블, 네벨, 세베시, 스타로두프, 노브고로드-시베르스키 등 여러 도시와 요새를 점령하며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1632년 12월 5일, 셰인의 군대는 스몰렌스크에 도착하여 포위 공격을 시작하였다. 스몰렌스크는 당대 최고 수준의 요새로, 약 1,600명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수비대(알렉산데르 코르빈 고시에프스키 보이보드 지휘)가 방어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포위선을 구축하고 포격을 가했으나, 중포의 도착이 지연되고 화약이 부족하여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였다.
1633년 여름, 새로 선출된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Władysław IV Vasa)가 약 21,500명의 구원군을 이끌고 스몰렌스크에 도착하였다. 동시에 크림 타타르 군대가 러시아 남부 국경을 대규모로 침공하여 러시아 남부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이로 인해 많은 러시아 귀족과 군인들이 스몰렌스크 전선을 이탈하였다. 또한 자포로제 코사크 군대가 폴란드 편에 합류하였다.
브와디스와프 4세의 군대는 러시아군의 포위선을 돌파하고 오히려 셰인의 군대를 포위하였다. 1634년 2월, 보급과 식량이 고갈되고 용병들이 대거 이탈한 상황에서 셰인은 항복 협상을 시작하였다. 1634년 2월 25일(일부 자료는 3월 1일), 셰인의 군대는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공성 포병을 남겨둔 채 깃발과 12문의 야포를 보유한 상태로 철수하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폴랴놉카 조약
1634년 4월 30일부터 6월 4일(구력 5월 14일)까지 뱌지마와 도로고부시 사이의 폴랴노프카 강변 셈레보 마을에서 평화 회담이 열렸고, 폴랴놉카 조약(Treaty of Polyanovka)이 체결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영토는 데울리노 휴전 당시의 국경을 기본적으로 확인하여 스몰렌스크와 체르니히우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잔류하였다.
- 러시아는 세르페이스크(Serpeysk) 시와 그 주변 지역을 되찾았다.
- 브와디스와프 4세는 러시아 차르 칭호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20,000 금 루블의 배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러시아의 레갈리아(왕권 상징물)를 반환하였다.
-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결과 및 영향
군사적으로는 러시아가 패배하였으나, 외교적으로는 브와디스와프 4세가 러시아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미하일 표도로비치 차르의 정통성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전쟁의 결과를 '무승부'에서 '패배'까지 다양하게 평가한다.
러시아 측에서는 패배의 책임을 물어 총사령관 미하일 셰인이 반역죄로 기소되어 1634년 4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부관 아르테미 이즈마일로프와 그의 아들 바실리도 함께 처형되었다.
이 전쟁의 경험은 러시아 군대 발전에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신형 연대'가 가장 전투력이 높은 부대임이 입증되어 이후 정부는 이들 연대의 편성을 지속하는 한편, 외국 용병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다. 또한 남부 국경 방어의 중요성이 확인되어 1635년부터 벨고로드 방어선 건설이 시작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에서는 정교회 신자들의 법적 지위에 긍정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코사크의 군사적 지원에 대한 대가로 정교회 키예프 대주교구가 합법화되는 등 정교회에 대한 탄압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