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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화궁

순화궁(順和宮)은 조선 제24대 왕 헌종(憲宗)의 후궁인 경빈 김씨(慶嬪金氏)에게 내려진 궁호(宮號)이자, 그가 거처하던 궁가(宮家)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한자로는 '순할 순(順)'과 '화할 화(和)'를 써서 '순화궁'이라 표기한다.

경빈 김씨는 주부 김재청(金在淸)의 딸로, 1832년(순조 32)에 태어났다. 1847년(헌종 13)에 순원대비(純元大妃)가 헌종에게 후사가 없음을 염려하여 정식으로 간택하여 후궁으로 들였고, 그해 경빈으로 책봉되었다. 이때 경빈에게 내려진 궁호가 순화궁이다. 순화궁은 경빈 김씨에게 속한 궁방전(宮房田) 및 재산을 관리하고 사후에 제사를 맡아 지내던 궁가의 명칭이기도 하였다.

1849년(헌종 15) 헌종이 승하한 후 경빈 김씨는 궁궐 밖으로 나와 살게 되었는데, 그가 거처한 곳은 한성부 중부 견평방,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원래 세종의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永膺大君)의 딸 길안현주(吉安縣主)와 그 사위 구수영(具壽永) 부부가 살던 집이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조선 중종이 딸을 위해 지어 '순화궁'이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중종에게 순화공주라는 딸은 없었으므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후 영조 연간까지 구씨 집안이 소유 및 관리하다가, 19세기 안동 김씨 세도가의 일원인 김흥근(金興根)의 소유로 넘어갔다. 헌종 사후 경빈 김씨가 이 집에 머물게 되면서 경빈의 궁호를 따 '순화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경빈 김씨는 1907년(광무 11) 6월 1일 이곳에서 사망할 때까지 거주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인 1908년(융희 2), 궁내부 대신이었던 이윤용(李允用)에게 가옥이 넘어갔고, 곧 그의 동생 이완용(李完用)이 차지하였다. 이에 따라 순화궁에 속했던 궁속(宮屬)들은 서소문 안에 있던 엄준원(嚴俊源)의 집으로 옮겨졌다. 1911년에는 다시 남작 장석주(張錫周)에게 토지와 가옥이 넘어가고, 궁속들은 북부 관광방 간동(諫洞)에 있던 전 호위대 영사(營舍)로 이전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제동(齊洞)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옛 순화궁 자리는 이완용에 의해 전세로 내놓아졌고, 전직 궁중 숙수(熟手)이자 명월관(明月館) 사장이었던 안순환(安淳煥)이 세들어와 음식점 태화관(太華館, 후에 泰和館으로 개명)을 차려 운영하였다. 이 태화관은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을 선언한 장소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1921년 이완용이 건물을 감리교 선교부에 매각하였고, 태화여자관,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80년 도시개발계획으로 철거되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으며, '순화궁터' 표지석이 남아 있다.

순화궁의 건축적 형태는 여러 도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경빈 김씨가 살았던 당시의 순화궁 도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이문내구윤옥가도형(里門內具允鈺家圖形)」이라는 명칭으로 남아 있고, 서소문 안과 제동에 있을 당시의 도면은 각각 「순화궁도형(順和宮圖形)」과 「재동순화궁도형」이라는 이름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경빈 김씨가 순화궁에서 궁체로 쓴 《국기복색소선(國忌服色素膳)》과 《사절복색자장요람(四節服飾資粧要覽)》 두 권의 필첩은 '순화궁첩초'라고도 불리며, 1996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1호로 지정되어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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