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PIVERSE

쇼와공황

쇼와공황(昭和恐慌)은 일본 제국 쇼와 시대 초기에 발생한 일련의 경제 공황을 가리키는 역사적 용어이다. 일본어 표기는 昭和恐慌이며, 로마자로는 Shōwa Kyōkō로 표기한다. 이 용어는 넓게는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에 걸쳐 일본 경제를 위기로 몰아넣은 여러 경제 위기를 총칭하며, 좁게는 1930년부터 1931년까지의 심각한 경기 침체를 특정하기도 한다. 일부 학술 자료에서는 1927년의 쇼와 금융 공황(昭和金融恐慌)과 1930년대 초의 공황을 구분하여 서술하기도 한다.

배경

일본 경제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쟁 특수로 크게 호황을 누렸으나, 전쟁 종전 후 1920년에 반동 불황(反動恐慌)에 빠졌다. 이후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지진 피해 복구와 관련된 지진 어음(震災手形)이 대량으로 발행되었고,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막대한 불량 채권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은행권의 재무 구조가 악화되면서 금융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취약해진 상태였다.

쇼와 금융 공황 (1927년)

1927년 3월부터 일본에서는 은행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하며 금융 공황이 전개되었다. 같은 해 4월 일본은행이 대장성(일본 재무성)의 대만은행 구제 금융 요청을 거부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와카츠키 내각이 붕괴하였다. 보통은행 전체의 약 10%에 해당하는 은행들이 문을 닫았으며, 피해는 주로 중소 규모 은행에 집중되었다. 이 사태는 일본 재계에서 재벌 계열 대형 은행이 금융 시장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쇼와 공황 (1930년~1931년)

세계 대공황과 금 해금

1929년 10월 미국 뉴욕 증시가 폭락하면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같은 시기 일본은 구(舊) 평가액 기준으로 금 본위제에 복귀하는 금 해금(金解禁) 정책을 시행했다. 당시 하마구치 내각의 재무대신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는 100엔당 49.85달러라는 금 수출 금지 이전의 옛 평가액으로 금 해금을 단행하였다. 이는 당시 시장 실세 환율(약 100엔당 46.5달러)보다 엔을 고평가한 것으로, 사실상 엔화의 가치 상승(엔고)을 초래하였다.

금 해금 직후 일본에서는 해외로 대량의 정화(正貨, 금화)가 유출되었다. 해금 단행 후 불과 두 달 만에 약 1억 5,000만 엔이 유출되었고, 1930년 한 해 동안 총 2억 8,800만 엔에 달하는 정화가 해외로 빠져나갔다.

경제 지표 악화

1929년을 100으로 보았을 때의 경제 지표 추이는 다음과 같다.

항목 1929년 1930년 1931년
국민 소득 100 81 77
도매 물가 100 83 70
쌀값 100 63 63
면사 가격 100 66 56
생사 가격 100 66 45
수출액 100 68 53
수입액 100 70 60

엔고와 긴축 재정 정책으로 인해 수출이 급감하였고, 물가와 임금이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이 심화되었다. 생사(生糸) 등 수출 품목의 가격이 크게 폭락하면서 농촌과 중소기업이 특히 큰 타격을 입었다. 이를 쇼와 농업 공황이라고도 칭한다.

정부 대응과 영향

쇼와 공황은 일본 국내의 사회 불안을 증폭시켰다. 1931년 3월에는 이노우에 준노스케 재무대신이 극우 성향의 우국단체에 의해 암살되었다(사쿠라다몬 사건). 같은 해 9월 일본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1년 12월 일본 정부는 금 수출을 다시 금지하며 금 본위제를 이탈하였다. 쇼와 공황을 비롯한 일련의 경제 위기는 일본 사회에서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에 대한 불신을 확산시키고, 이후 군국주의와 파시즘으로 치닫는 정치적 분위기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술적 평가이다.

참고

쇼와 공황은 일본 경제사에서 실증적으로 검증된 역사적 사건으로, 일본 국내외의 학술 문헌과 경제사 교재에 널리 수록되어 있다. 다만 '쇼와 공황'이라는 용어가 좁은 의미(1930~1931년의 공황)와 넓은 의미(1927년 금융 공황을 포함한 일련의 위기)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어, 문헌에 따라 지칭 범위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둘러보기

더 찾아볼 만한 주제

    전체 문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