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세호(宋世浩)는 한국 근대사에서 확인되는 동명이인의 인물들로, 주로 두 명의 독립운동가가 알려져 있다.
1. 송세호(宋世浩, 1893~1970)
1893년 8월 29일 경상북도 선산군(현재의 구미시 선산읍)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이며, 어렸을 때 출가하여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 머물렀던 승려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서울 종로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3·1운동이 발생한 해인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강원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임시정부 재무부 재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승려 복장으로 일제 관헌의 검색을 피하면서 국내를 오가며 활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9년 5월에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 상하이 지부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의친왕 이강의 상하이 탈출 계획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 11월 의친왕 탈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송세호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동료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0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2년 12월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출옥한 이후에는 한용운을 따라 불교를 통한 독립 운동에 전념한 것으로 전해진다. 1931년 6월 중국 상하이로 이주하여 덕창 담배 공장을 운영했으며, 광복 후에도 중국에 잔류하여 1970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다만 이 인물에 대해서는 논란도 존재한다. 2019년 4월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는 송세호가 중일전쟁 시기인 1939년 상하이에서 일본군 위안소로 여겨지는 시설을 운영한 조선인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1939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보고된 '남화한인청년연맹 관계자 검거의 건' 문서에는 송세호가 '일찍부터 일본의 밀정 행위에 종사한 친일 조선인'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국가보훈처는 이와 관련해 독립유공자 선정 검증 단계에서 해당 내용을 검토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며 조사에 착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력과 친일 행적 의혹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2. 송세호(1900~1921)
위 인물과는 별개의 인물로, 1900년 평안북도 자성군 출신이다. 독립당원으로 항일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함경남도 장진경찰서에 유치되었으며, 1921년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인물에 대해서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원 및 이름의 의미
'송세호'라는 이름은 한자 '송(宋)', '세(世)', '호(浩 또는 鎬)'의 조합으로, 한자 인명으로서 특별한 고유 어원을 갖는 단어는 아니며 일반적인 한국식 한자 이름에 해당한다. '송세호'는 이름 자체가 특정 개념이나 사물을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개인의 고유명사로서, 위에서 언급한 두 명의 근대 인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