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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인

소작인(小作人)은 자기의 농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지주(地主)로부터 토지를 빌려 경작한 농민을 가리킨다. 영어로는 tenant farmer에 해당하며, 소작농(小作農)이라고도 부른다. 소작인은 지주에게 소작료(도조)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토지를 사용하였으며, 소득의 일부를 지주에게 바치는 구조로 운영되었다.

소작인의 기원은 고려시대 초반부터 그 흔적이 발견된다. 고려시대에는 '전호(佃戶)', '전객(佃客)', '병작인(竝作人)'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 농민 계층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수확물을 지주와 나누는 병작반수(竝作半收)의 형태로 생산 활동을 하였다. 다만 고려 중기까지는 노비 노동에 의존하는 대토지 경영이 주를 이루었고, 소작 경영은 보편적인 형태는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과전법(科田法) 시행 이후 병작제가 확대되었고, 특히 공전(公田)을 중심으로 소작 관행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 경제적 계약 관계로서의 지주-소작 관계가 형성되었으며, 정액지대 형태의 도지제(賭地制)와 경작권이 상품화된 도지권이 발생하는 등 소작 제도의 발전이 나타났다.

일제강점기에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소작인의 관습적 경작권이 부정되고 소작권이 법적으로 소멸되었다. 지주제가 보호·육성됨에 따라 1920~1930년대 이후 자작지가 감소하고 소작지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소작료율이 수확물의 5~6할에 이르렀고 일부 지역에서는 7~8할에 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소작쟁의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 시기 소작인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 소경영자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1949년 농지개혁법의 공포로 소작인에게 농지가 유상분배되면서 일제시대의 기생지주제는 법적으로 소멸하였으나, 이후 영세한 자작농의 토지 전매와 산업화 과정에서 법으로 금지된 소작제가 다시 나타나는 경향이 관찰되었다.

소작인의 개념은 자본제적 차지농(借地農)과 구별된다. 자본제적 차지농은 토지에 자본을 투자하여 이윤 획득을 주된 목적으로 상품경제적 생산을 하는 반면, 소작인은 생활수단의 획득이 주목적으로 자연경제적 생산을 영위하며 자신의 노동을 기반으로 한 소경영 생산자로서 지주적 토지소유에 예속된 존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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