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요시노부(宗義誠, そう よしのぶ)는 일본 에도 시대 쓰시마 후추번(対馬府中藩)의 제6대 번주이다.
겐로쿠 5년(1692년) 3월 15일, 쓰시마 후추번 제3대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真)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겐로쿠 16년(1703년) 1월, 형인 제5대 번주 소 요시미치(宗義方)로부터 8백 석을 하사받고 분가하여 우지에 가(氏江家)를 세웠으며, 요시미치로부터 이름자 한 글자를 받아 우지에 미치노부(氏江方誠)라고 칭하였다.
교호 3년(1718년), 형 요시미치가 사망하자 그의 양자로 쓰시마 소 가문의 가독을 이어받아 쓰시마 후추번 제6대 번주가 되었고, 이름을 소 요시노부(宗義誠)로 바꾸었다.同年 12월에는 종4위하 시종(侍従) 및 쓰시마노카미(対馬守)에 서위·임관되었다.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서, 조선 숙종 47년(1721년)에는 전임 도주 소 요시미치의 죽음을 조문하고 소 요시노부의 승습을 축하하기 위하여 당상역관 최상집과 당하역관 이장 등 88명으로 구성된 문위행(問慰行) 사절단이 쓰시마로 파견되었다. 이 사절단은 3월 18일부터 6월 18일까지 후추에 머물렀는데, 당시 최상집 일행이 연루된 문위행 사절단 최대 규모의 밀무역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후 문위행 인원 통제와 사행원 몸수색 등에 관한 새로운 규정이 제정되었다.
번정 운영에 있어서는 쓰시마 후추번의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검약령을 내리는 등 여러 시책을 시도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재정난을 더욱 악화시켰다.
교호 15년(1730년) 11월 6일, 적남 요시유키(義如)를 데리고 에도(江戸)로 향하던 도중 오사카(大坂)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39세였다. 요시유키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동생 미치히로(方熈)가 양자로 가독을 이었다. 조선의 기록인 《변례집요》에 따르면, 영조 6년(1730년) 11월 6일에 사망한 옛 도주 소 요시노부의 고부차왜(告訃差倭)로 등영통(藤英通)이 조선에 와서 소 요시노부가 작성한 유언장과 유품을 전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