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르부르 습격(Raid on Cherbourg)은 7년 전쟁(1756~1763) 중인 1758년 8월 7일부터 8월 16일까지, 영국 해군과 육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의 셰르부르(현재 셰르부르옥트빌)를 공격한 군사 작전이다. 영국 정부가 추진한 프랑스 해안 습격 정책("descents")의 일환으로 수행되었다.
배경
1757년 이후 영국은 해군력의 우위를 활용하여 프랑스 해안을 습격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이는 프랑스군을 독일 전역에서 끌어내어, 영국의 동맹국인 프로이센·하노버·브라운슈바이크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1757년 가을 영국은 로슈포르 습격을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758년 6월에는 생말로 습격을 실행하여 상대적 성과를 거두었고, 이에 고무된 영국은 추가 습격을 계획하였다.
경과
원정군은 해상에서는 코모도어 리처드 하우가, 육상에서는 토머스 블라이 중장이 지휘하였다. 약 100척 이상의 함선과 약 8,000~13,000명(추정치 편차 존재)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윌스 왕세자의 동생인 에드워드 왕자도 원정에 동행하였다.
영국 함대는 1758년 8월 6일 셰르부르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8월 7일, 영국군은 셰르부르 서쪽 우르빌르나크빌 부근 해변에 상륙하였다. 이 지역은 조류가 거세어 상륙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어 방어가 취약했던 곳이었다. 영국군은 함포 사격의 엄호 아래 무사히 상륙에 성공하였고, 프랑스 방어군은 지휘관 콩트 드 레이몽의 명령으로 내륙으로 후퇴하였다.
8월 8일, 영국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셰르부르 시내에 진입하였다. 이후 약 일주일 동안 항구 시설과 요새를 파괴하고, 선박을 불태우고, 대포를 노획하였다. 영국군은 철수 시 노획한 대포를 영국으로 운송하였다.
피해와 결과
습격 과정에서 셰르부르의 항구 시설은 심각한 파괴를 입었다. 민간 피해도 컸으며, 프랑스 측 기록에 따르면 주민 피해는 80만 리브르 이상으로 집계되었다. 마을은 44,000리브르의 공물을 요구받았으며, 이 중 일부를 즉시 지불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인질을 내주어 담보로 삼았다.
영국군은 8월 16일 철수하여 8월 18일 영국으로 출항하였다. 영국 측 기록에 따르면 사상자는 약 20명 전사, 30명 부상에 불과했으나, 프랑스 측은 영국 측 손실이 700명 이상이라고 주장하여 양측 기록에 큰 차이가 있다.
이 습격은 영국의 사기를 고양시켰고, 영국 언론은 백년 전쟁 이후 최초의 성공적인 상륙 작전이라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758년 9월 블라이가 다시 시도한 생말로 습격은 생카스트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여, 이 해안 습격 정책은 중단되었다.
습격의 전략적 효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군사적·물질적 피해는 셰르부르 일대에 국한되었으나, 프랑스 본토 해안이 영국 해군력에 취약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어 프랑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평가가 있다. 반면 전쟁 전체의 흐름에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습격 이후 프랑스는 영국 본토 침공 계획을 세웠으나 해전에서의 패배로 무산되었다.
참고 문헌
주요 자료로는 Anderson(2001)의 《Crucible of War》, Rodger(2006)의 《The Command of the Ocean》, Middleton(1985)의 《The Bells of Victory》, Simms(2008)의 《Three Victories and a Defeat》 등이 있다. 프랑스 측 사료로는 Retau-Dufresne(1760)의 셰르부르 역사서, Vanel(1906)의 《Étude sur la prise de Cherbourg en 1758》 등이 존재한다.